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관념은 무일푼의 인쇄소 견습공에서 거부가 된 건국 초기 정치 지도자 벤저민 프랭클린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이런 인식으로 인해 가난한 부모들은 자식들만큼은 보란듯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이와 같은 믿음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믿음과는 달리 미국은 유럽국가나 캐나다 등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사회적 이동이 활발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나 부잣집의 자식들이 가난해질 가능성은 과거 수십년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이 13일 보도했다. 저널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학자들은 미국에서 부모의 경제적 우위가운데 자식 세대에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최저 20%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추정대로라면 아무리 부잣집이라도 하더라도 손자 세대에 이르면 경제적 우위는 거의 상실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더 나은 자료들과 더 많은 조사대상을 통해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사회적 이동 가능성이 종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최근의 연구결과는 부모 세대의 경제적 우위 가운데 최소 45%, 최대 60%가 자식 세대에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분석이 맞다면 부모는 물론 조부모가 부자인 사람조차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출발부터 큰 우위를 점하게 된다. 구체적인 연구 분석을 보면 시카고 연방준비은행의 사슈카르 마숨더 연구원이 1963-1968년에 태어난 사람들의 출신 가정과 1995-1998년의 소득을 비교 분석한 결과 소득이 하위 25%인 가정 출신은 자신의 소득이 전체의 절반 이하에 속할 확률이 68%인 반면 절반 이상에 속할 확률은 32%에 그쳤다. 반대로 출신 가정의 소득이 상위 25%에 든 사람은 소득은 절반 이상에 속할 확률이 65%, 절반 이하에 들 확률이 34%로 나타났다. 캐나다 통계청의 마일스 코락 이코노미스트는 미국과 유럽, 캐나다의 여러 통계 자료들을 분석해 각국의 사회계층간 이동성을 분석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은 조사대상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사회 이동성이 저조하고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보다는 좀 나은 편이며 캐나다와 노르웨이는 미국보다 훨씬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미국의 사회계층간 이동은 인종별로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아메리칸 대학의 톰 허츠 이코노미스트가 미시간대학이 32년간 추적해온 6천273가구의 소득상황을 분석한 결과 소득이 하위 10%에 속하는 가정 출신 가운데 백인은 17%만이 여전히 같은 하위권에 머문 반면 흑인은 자식 세대에서도 하위 10%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42%에 달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미국의 사회적 이동이 생각보다 그리 활발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로 대학 교육이 예전보다 훨씬 중요해졌다는 점을 들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역시 대학을 나온 배우자를 만나 자식을 좋은 초등학교와 중고교를 거쳐 대학에 보내고 그 자식도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보니 사회적 이동성은 제약된다는 설명이다. 또한 잘 사는 부모는 건강한 자식을 낳을 확률이 많고 어릴 때 건강했던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건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나 태도나 성격 등이 유전된다는 점도 부 또는 가난이 대물림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고 저널은 밝혔다. 저널은 앞으로도 몇차례의 기획 연재 기사를 통해 미국의 빈부 격차 실태를 해부할 예정이다. (뉴욕=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