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 이후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던 세계 반도체 경기에 대형 악재가 터졌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당국이 삼성전자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인피니언 하이닉스 등 세계 4대 D램업체들의 가격담합 혐의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에 나선 것.미국과 EU는 4개 메이저 업체들이 과점하고 있는 D램 시장(연간 1백60억달러)이 지난 몇 년간 급격한 가격변동을 겪어온 과정을 예의주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업체들은 혐의 내용을 부인하고 있지만 외신들은 이들 업체에 대한 기소가 임박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만약 가격담합이 사실로 나타날 경우 해당 업체는 수천억원대의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2분기 연속 영업이익을 내며 회생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하이닉스반도체는 향후 현금흐름에 타격을 입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메일이 화근? 외신들에 따르면 업체 관계자들 간에 주고받은 이메일들이 담합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우선 지난 2001년 10월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간부가 모 거래처에 보낸 이메일이 문제가 됐다. 여기에는 삼성전자와 인피니언이 가격담합을 시도했으며 마이크론이 PC업체들을 상대로 공급가 인상을 시도한 사실이 담겨 있다. "마이크론이 가격 인상조치를 취할 경우 다른 업체들도 동조할 것이라는데 모든 D램 공급업체가 합의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또 다른 이메일은 지난 1997년 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의 한 고위간부가 다른 D램업체들에 보낸 것으로 "앞서 수차례 말했듯이 우리는 인텔이 만들지 않는 D램을 만들고 있다"며 "우리 모두가 자원을 합친다면 이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길로 갈 필요가 없을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검찰은 이같은 내용에 비춰볼 때 D램 업체들이 지난 2002년 메모리 칩 가격이 급등하기 전 수시로 가격담합을 모의했다고 보고 있다는 것이 외신의 보도다. ◆함구 vs 부인 해외 업체들은 혐의 여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채 조사 당국의 조사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의 데이브 파커 대변인은 "우리는 미 법무부측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피니언의 구엔터 가우글러 대변인도 다우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와 관련해 EU 위원회의 질의서에 성실하게 답변했다"고 말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가격 담합을 시도한 사실이 없으며 앞으로도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미국 오스틴 공장이 조사를 받고 있으나 세계 1위 업체로서 가격담합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이닉스 관계자 역시 "문제의 이메일이 워낙 오래된 것이라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가격 조작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 회사의 기본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마이크론과 인피니언이 각각 미국과 EU의 소속 업체라는 점때문에 애꿎은 한국업체들만 피해를 입게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이미 유럽 등으로부터 상계관세를 부과받고 있는 하이닉스로선 향후 해외영업에서 이중의 부담을 안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