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률 ‘추락’, 보험료 체납률 ‘상승’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표현 중 국제사회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 ‘토끼장 속에 사는 일벌레’일 것이다. 집은 비좁아도 불평 한번 제대로 않고 회사에 나와서는 군말 없이 일만 한다고 서구 전문가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일벌레라는 말속에 근면, 검약의 뜻도 함께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땀 흘려 번돈을 헛되이 쓰지 않고 저축부터 하고 보는 일본인들의 습관은 일본에 경제우등생의 타이틀을 안겨준 거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오늘의 일본이 처한 현주소는 이 같은 과거의 찬사를 크게 빗나가고 있다. 제동이 풀린 듯 내리막길을 걷는 저축이 장래 불안을 부추기는 핵심 고민으로 떠오르고 있어서다. 일본 이코노미스트들은 경제 활력을 위협하는 불안요인으로 저축, 인구, 연금 및 세금, 그리고 의료를 꼽으면서 저축을 주저 없이 첫머리에 올리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들이 지적하는 저축 관련 불안은 우선 숫자만으로도 실상을 가볍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 10월 발표한 경제재정백서는 가계저축률에 적신호가 켜져도 단단히 켜졌음을 알리고 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10%를 크게 웃돌며 선진국 중 톱을 달리던 일본의 가계저축률은 2001년 6.9%까지 추락했다. 프랑스, 독일보다 밑으로 떨어진 것은 물론 돈 씀씀이가 헤프다고 일본인들이 손가락질했던 미국과의 차이가 바짝 좁혀졌다. 내각부는 2002년 저축률은 2001년보다 훨씬 더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한술 더 떠 자금순환계정 방식으로 추정한 조사치라며 2003년 4~6월 저축률이 1.3%라는 사상 최악의 수준까지 곤두박질쳤다고 밝히고 있다. 내각부는 저축률이 국가적 고민거리로 부상한 원인을 일차적으로 장기 디플레이션과 인구 고령화에서 찾고 있다. 정부와 기업 모두가 불황에 허덕이니 손에 쥐는 돈과 일자리가 줄었고 이러다 보니 내일의 저축보다 오늘의 빵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출산인구 감소로 어린 새싹의 비율이 낮아진 반면, 노동, 생활력이 달리는 노인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저축을 헐어 쓰는 계층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고 내각부는 진단하고 있다. 버블 경제 시절에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만을 믿고 ‘마이홈’을 장만했다가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막차인생이 40대 이상의 세대에 수두룩하게 널린 것도 저축률 하락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자녀교육, 대출 원리금 상환 등에 써야 할 돈이 적잖은 판에 직장에서는 월급을 줄여야 한다고 아우성이니 저축을 할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는 분석이다. 근로자 평균급여 5년 연속 뒷걸음질 얇아진 월급봉투는 기업들의 금고 사정을 꿰뚫고 있는 국세청 등 각종 기관, 단체의 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국세청의 민간급여 실태조사에 따르면 민간회사에 근무하는 근로자 1인이 받는 평균급여는 2002년 447만8,000엔으로 5년 연속 뒷걸음질쳤다. 2001년보다 6만2,000엔이 줄어든 수준이다. 일본 금융홍보중앙위원회가 내놓은 조사결과도 국세청의 조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가계 금융자산에 관한 2003년 여론조사에서 ‘1년 전보다 저축이 줄었다’는 비율은 51%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줄었다고 답한 응답자들이 제시한 이유 중 가장 많았던(59%) 것은 ‘정기 수입 감소로 인한 저축 인출’이었다. 조사는 저축을 꿈도 꾸지 못하는 세대가 전체의 20%에 육박해 60년대 초반 이후 40년 만에 최고수준을 기록했다며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추락하는 저축률에 담긴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주가상승, 수출호조에 따른 기업 순익 증가로 경제가 온기를 되찾은 것 같아도 저축률만 놓고 보면 일본경제는 체력 자체가 후진 기어를 넣은 게 분명해졌다고 경고하고 있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구마노 히데키 선임연구원은 “최근 수년간의 저축률 하락은 인구 고령화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 요인을 함께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가계 저축률의 하락은 필연적으로 국민부담률(세부담에 사회보험료 부담을 더한 것)의 상승을 초래한다”며 “이 같은 시그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경고했다. 기우치 도에이 노무라종합연구소 일본경제연구실장은 잠재성장률 측면에서 저축률 하락에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잠재성장률이 노동력, 자본, 기술진보의 3요소로 결정된다고 볼 때 일본의 잠재성장률 감소는 특히 투입자본 위축에서 비롯된 양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저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만큼 곤궁해진 호주머니 사정은 일본 정부의 연금 운용에도 당장 주름살을 안겨주고 있다. 후생노동성은 20세 이상의 성인남녀 누구나가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돼 있는 국민연금의 2002년 보험료 체납률이 38%에 육박한다는 조사결과를 최근 내놓았다. 10년 전인 92년만 해도 14% 수준에 불과했던 체납률이 거의 3배까지 치솟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 관계자들과 이코노미스트들이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한창 일할 나이의 2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20대로만 한정해 본다면 보험료 체납률은 50%를 넘고 있다. 학교졸업 때까지 보험료 납부연기 혜택이 주어지는 대학생들을 포함할 경우 20대의 체납률은 70%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험료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20대 젊은이들이 국민연금에 무관심하거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후생노동성이 20대 학생과 프리터(비정기적 부업으로 먹고 사는 근로자) 등 7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표본조사에서는 절반이 넘는 58%가 노후에 불안을 느낀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들 중 보험료를 낸다는 응답자는 49%에 그쳤다. 저축여부를 묻는 질문에서는 44%만이 ‘예스’라고 대답했다. 노후를 책임져줄 두 바퀴와도 같은 저축과 연금이 급격히 흔들리자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내일에 대한 불안이 열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지난 11월9일 끝난 43회 중의원선거의 최대 쟁점은 단연 연금이었다. 핵심 이슈로 단골메뉴 대접을 받았던 외교, 안보, 정치, 교육 등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내가 낸 보험료가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 퇴직 후 연금은 꼬박꼬박 받을 수 있는지에 유권자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 선거 직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장 관심 있는 공약으로 연금을 꼽은 유권자가 43%에 달한 반면, 교육은 단 6%에 그쳤을 정도였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저축률 급락과 연금불안, 인구감소 등의 악재가 단기 대증요법으로 치유될 문제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성장 저력을 뿌리부터 위협하는 이들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대결단(연금), 살림살이의 과감한 구조조정(저축), 사회보장제도의 손질(인구감소) 등 근본적이고도 장기적 해결책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거에는 회사가 가계의 방파제 역할을 맡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몸에 맞는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생활경제 전문애널리스트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오기바라 히로코씨는 개인이 자력으로 시련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눈앞에 닥쳐왔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금은 연금불안, 소득감소 등의 역풍과 맞싸워 무모한 승부를 펼칠 때가 아니라며 개인도 장기전 체제로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가계운용 시스템을 구축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남편이 돈을 벌고 주부는 가사에 전념하는 ‘분업’ 시대는 가고 힘을 합치는 ‘협업’ 시대, 그리고 주말에도 돈맥을 캐야 하는 ‘주말기업’ 시대가 일본 열도를 둘러싸고 있음을 그는 알리고 있는 것이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