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가 바닥을 모른 채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라 경제의 미래 비전을 얘기하는 것은 한가하게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이야 말로 국가 경제 비전을 굳건하게 정립할 절호의 기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은 우리 경제를 살리고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그랜드 비전(grand vision)이다. 단기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동시에 중ㆍ장기적으로 도약의 기회를 잡아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지금의 위기를 세계적인 경기침체에 따른 단기 현상으로 보고 있다간 우리는 3류 국가로 추락할 지도 모른다. 현재의 경기침체는 지난 97년말 외환위기 당시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심각하다. 뿌리부터 흔들거리는 구조적인 위기라서 더욱 큰 문제다. 90년대말 경제위기 때만 해도 정부나 재계나 '펀더멘털(fundamental:기초)은 튼튼하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주요 산업의 기술 경쟁력, 모험을 즐겨하는 기업가 정신,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의 근로의욕 등이 대표적인 '기초'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산업 경쟁력을 보면 미국 일본 등 가장 중요한 수출시장에서 우리는 이미 중국에 뒤지고 있다. 중국은 TV 36%, 에어컨 50%, 세탁기 24% 등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면서 일본을 추월해 세계 최대 가전생산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교적 고도화된 산업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빠른 추격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반도체 자동차의 경우는 7년 이상 격차를 벌이고 있다지만 △철도 에너지는 2∼3년,△무선통신 공작기계 전자부품은 4∼5년, △조선 생명공학 휴대폰 소프트웨어는 6∼7년의 격차밖에 내지 못했다. 길게 잡아 10년이면 모든 산업분야에서 중국을 오히려 따라가야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모험적인 기업가 정신은 또 어떤가. "한국 기업가들은 파산해 감옥에 들어가서도 새 사업계획을 짠다"는 칭송은 온 데 간 곳 없고 '아직도 사업을 하십니까'가 인사가 된지 이미 오래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중소ㆍ벤처기업은 그 나름대로 '기업하기 어려운 나라'를 호소하고 있고 발빠른 업체들은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다. 근로의욕은 말할 것도 없다. 실업자가 80만명이 넘지만 3D업종은 외국인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다. 펀더멘털부터 흔들리고 있는게 현실이란 얘기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사이 경쟁국들이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산업(Industry) 21'이란 비전으로 서비스금융 정보 분야 등 고부가가치산업을 집중 유치해 나가고 있다. 중국은 다국적 기업 지역본부 유치를 목표로 이제는 지식기반산업 유치를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에 매진하고 있다. 홍콩의 경우도 기술집약산업 위주의 외국인투자 유치를 통해 비즈니스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다는 전략을 가동한지 오래다. 위기 극복 차원 뿐 아니라 기회 선점 차원에서도 동북아 경제 중심 건설은 시급한 과제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한ㆍ중ㆍ일 3국의 비중은 이제 무시 못할 정도다. 세계 경제의 5분의 1, 동아시아 경제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연합(EU)처럼 블록화되면 인적 교류 및 물적 교역이 급증해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대할 수도 있다.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은 특히 우리나라에 유리한 측면이 많다. 이미 선진국이 돼있는 일본,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역내외에서 견제를 심하게 받고 있다. 지역적으로나 산업경쟁력 측면에서 우리나라가 중간자,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동북아의 중심 역할을 자임하는 비전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는 얘기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