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는 올 상반기중 총 1조8천3백68억원의 빚을 갚았다. 불과 6개월만에 회사 전체 유동부채(2001년말 6조6백30억원)의 30% 가량을 상환한 셈이다. 지난해와 올 상반기중에 벌어들인 당기순이익 2조5백88억원의 90%를 차입금 해소에 사용했다는 얘기도 된다. 이처럼 뭉칫돈을 갚고 나서도 현대차의 '현금 보유액(현금+예금+단기금융상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 6월말 현재 현금보유액은 정확하게 4조원으로 작년말의 2조9천억원보다 37.9% 늘어났다. 이 기간중 9천억원 이상을 각종 충당금 명목으로 쌓은 덕분이다. 현대차는 현금보유 비중을 늘리고 차입금을 줄여나가는 대기업들의 움직임이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난 케이스다. 이런 사정은 삼성전자 포스코 등 우량 제조업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금이 넘쳐나도 마땅한 투자처를 찾기가 쉽지 않고 리스크 관리가 강화되면서 투자에 더욱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기 때문이다. 장차 불투명한 경제상황에 대비해 내부 현금유보를 최대한 쌓아둬야 한다는 재무 전략도 무시못할 요인이다. ◆'빚부터 갚고 보자' 지난해부터 재계에 유행하기 시작한 이른바 '시나리오 경영'은 기업들의 자금운용 기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장률 금리 환율 등 주요 경제지표를 가장 보수적(비관적)으로 전제한 상황에서 경영전략을 짜는 시나리오 경영은 '투자 확대'보다는 '경영리스크 축소'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삼성 LG SK 현대차 등 주요 그룹들은 실제 이익 규모에 관계없이 내부적으로 긴축경영을 펼쳐 왔다.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 3.4분기에 벌어들인 1조7천3백억원의 이익중 3천6백억원을 차입금 상환에 사용해 부채비율을 37.7%로 떨어뜨렸다. 작년말 부채비율이 95.5%에 불과했던 금호전기는 지난 5월 본사 사옥 매각대금(3백16억원) 전액을 부채를 줄이는데 썼다. 회사 관계자는 "그 결과 부채비율이 73.3%로 떨어지고 월평균 이자도 5억원 이하로 축소됐다"고 말했다. 지난해말 3백22.1%의 부채비율을 1백97.9%로 낮춘 대우조선해양도 상반기중 거둬들인 이익(1천3백20억원)의 대부분을 채권단에 되돌려 줬다. 대한항공 역시 상반기중 5천7백억원 상당의 빚을 갚아 부채비율을 2백% 이하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인터넷 업계의 선두주자인 다음커뮤니케이션도 올 상반기중 1백39.2%의 부채비율을 91.4%로 떨어뜨렸다. 이제 겨우 영업이익을 내고 있는 수준이지만 경영안정성 측면에서 보유 현금으로 빚을 갚은 것이다. ◆ '눈 높이가 달라졌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5천억원 정도의 현금을 갖고 있으면 재계에서 은근한 자랑거리가 됐다. 하지만 9월말 현재 6조3천7백억원의 현금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 측은 아직도 '목표액'에 미달한다고 말한다. 적어도 10조원 정도는 갖고 있어야 GE(제너럴일렉트릭) 인텔 IBM 휴렛팩커드 등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올해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는 현대차 역시 영업이익의 상당분을 판매보증충당금(1조6천6백억원) 폐차처리충당금(2천4백억원)으로 쌓아놓고 있다. 이는 비용으로 처리되지만 내부적으로는 현금과 동일한 효과를 갖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2년전 포드가 타이어 리콜사태 등으로 1백억달러가 넘는 돈을 한꺼번에 날리는 것을 목격했다"며 "현금보유고가 10조원은 돼야 안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3.4분기말 현재 52.4%의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있는 포스코도 현금보유액을 지난해말 9천1백56억원에서 1조3천1백27억원으로 늘렸다. 회사 관계자는 "어느 수준까지 현금을 늘리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차입금 상환과 내부 유보 확대전략은 지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LG전자는 최근 기업분할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규모이긴 하지만 보유 현금을 지난해말의 두배 수준인 1천1백억원으로 불려놓고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