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에서 1만5천평의 배 과수원을 경작하는 한갑평씨(65). 농작물재해보험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이달 초 10여일간 쏟아진 집중호우로 낙과(落果)가 생겼다. 생산량은 예년의 70%에도 못 미칠 것 같다. 호우피해로 판단한 그는 농작물재해보험금을 타러 최근 농협 봉황지점을 찾았으나 헛걸음만 했다. 지난 5월 4백2만원을 내고 가입한 보험은 태풍 우박 등에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호우피해는 보상 대상이 아니라는 게 농협의 답변이었다. 한씨는 "농협측이 연초에 보험에 들라고 조를 때는 언제고 정작 문제가 생기니까 규정을 들먹거리며 '나몰라'라 한다"며 "허울뿐인 농작물재해보험이 수해로 상처받은 농심을 또 한번 울리고 있다"고 한숨을 지었다. 농림부는 지난해 3월부터 사과 배를 재배하는 농민을 대상으로 태풍 등 자연재해를 입었을 때 보험금을 주는 재해보험 사업을 농협을 통해 시작했다. 그러나 보험 혜택 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운데다 실제 보험금을 탈 수 있는 가입자가 0.1%도 안돼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데도 농협은 가입자를 늘리려고 전국에서 조합 단위로 농민들에게 가입을 강권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현행 재해보험법에 따르면 농민들이 보험금을 탈 수 있는 자연재해는 태풍 우박 동상해 호우 등 4가지다. 이중 태풍 우박 등은 기본 계약으로 분류된다. 가입만 하면 피해 때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동상해와 호우는 기본 보험료의 50%를 추가 부담하는 옵션이다. 문제는 농민 대부분이 기본 계약만 맺었지 옵션은 추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는 거의 보상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농림부 집계 결과 올해 사과 배에 대한 재해보험에 가입한 농가는 9천3백39곳. 이 가운데 호우에 관한 특약을 신청한 농가는 전국에 걸쳐 5개 농가뿐. 농민들은 올해 60여억원의 보험료를 내고도 정작 혜택은 받지 못하고 있다. 호우피해를 보상받는 보험에 들었더라도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하루 강수량이 1백50㎜ 이상이어야 한다. 낙과는 대상이 아니며 뿌리 부분이 물에 잠기는 것만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농림부 농업정책과 관계자는 "보험 가입 전에 판매직원들이 어떤 경우에 대해 보험금을 주는지 충분히 설명한 뒤 농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게 없다"고 해명했다. 금융감독원 상품계리실 관계자는 "보험 혜택을 보는 사람이 1%도 안된다는 것은 농민들에게 상품을 무리하게 권유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며 "보험 사업자가 보험상품을 팔면서 강권한다든지,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가입시킬 경우 도덕적인 비난뿐만 아니라 행정처분 등 법적 제재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임상택 기자 lim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