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초. 세계무역센터(WTC)가 무너진 9.11 테러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뉴욕 JFK공항에서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떠나던 민간비행기가 추락했다. 탑승자는 전원 사망했지만 테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세계가 안도했다. 하지만 정말 안도의 숨을 내쉰 사람은 동국무역 뉴욕법인 김창식 사장이었다. 자신은 물론 직원들이 한달에도 몇번씩 타던 바로 그 비행기가 떨어진 탓이다. 다행히 그 날은 직원들이 타지 않았지만 목숨을 건 이들의 도미니카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동국무역은 지난 1988년 도미니카에 봉제공장을 설립했다. 자꾸만 줄어드는 대미 수출 쿼터문제를 해결하고 본사의 원단수출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공장이다. 이른바 '서울(원단생산)-도미니카(봉제)-뉴욕(판매)'의 수직적 3각분업시스템. 처음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92년부터 현지 특성에 맞는 생산제품을 결정해 우선 뉴욕에서 주문량을 확보한 뒤 생산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운영방식을 바꿨다. 그 결과 95년 첫 수익을 냈다. 지금은 봉제부문만 연평균 2천5백만달러의 매출에 1백20만달러의 수익을 내는 알짜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 99년 거래하던 제일은행이 매각되면서 뉴욕지점에서 받았던 여신 1천1백50만달러가 예금보험공사로 넘어갔는데 지금 벌써 절반 이상을 상환했다"는 김 사장은 "대미수출여건이 좋은 카리브해 국가를 활용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오는 2005년 미국의 수입쿼터가 철폐되면 세계 섬유시장은 큰 지각변동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숫자로만 보면 중국의 대미수출이 크게 늘고 그에 비례해 한국이 타격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그러나 활용하기에 따라선 한국 기업들의 기회가 더 커질 수도 있다는게 현지 전문가들의 얘기다. 궁극적 지향점은 '브랜드 마케팅'. 이윤이 적은 제조분야보다는 자본과 기술로 승부하는 고부가가치 쪽으로의 변신이다. 삼성물산이 지원하는 후부(FUBU)브랜드는 이미 성공대열에 오른 것으로 평가된다. 지난 96년 삼성이 지분참여와 함께 마케팅 파트너가 된 이 브랜드는 지금 미국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10대 브랜드안에 꼽힐 정도. 첫해 1천만달러에 불과하던 소매매출이 지금은 5억달러를 넘는다. "브랜드마케팅은 이제 우리나라 섬유산업이 나가야 할 방향"이라는 삼성물산 뉴욕법인의 이수기 상무는 "후부의 이익기여도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브랜드마케팅은 삼성같은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교포기업인 터보스포츠웨어는 중소기업도 브랜드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섬유는 결국 브랜드장사'라는 생각에 꼭 20년전 회사를 세운 정영인 사장은 디자인분야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퍼스트다운' '팻팜' 등의 브랜드를 연속 히트시키며 첫해 50만달러였던 매출울 연 1억2천만달러로 키웠다. 퍼스트다운 브랜드는 일본 기업에 로열티를 받고 넘겨줬는데 일본시장에서만 2천5백만달러나 팔리는 유명브랜드가 됐다. "섬유사업은 창조력이 생명"이라는 정 사장은 "창의성이 강한 한국인들이 디자인분야에 좀더 투자한다면 섬유강국이 되는 길이 어렵지 않다"고 강조한다. 맨해튼 남쪽 뉴저지주 세이레빌에 있는 터보 본사에는 언제나 성조기와 함께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대사관건물을 빼곤 뉴욕지역에서 유일하게 옥외에 휘날리는 태극기다. 한국 섬유산업이 미국땅에서 한단계 도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인 셈이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