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유럽에서는 이른바 '유럽의 역설(European Paradox)'이 화제다. 높은 수준의 과학지식과 연구기반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산업혁신 측면에서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는 현상을 빗댄 말로 널리 알려진 이 용어가 왜 다시 등장한 걸까. 지난 2월 유럽연합(EU)의 버스퀸(Busquin)연구집행위원은 한 국제포럼에서 '어떤 역설이 있다면 그 역설은 지금 반전되고 있다'는 표현으로 새로운 주장을 폈다. 유럽이 이제 혁신은 그런대로 잘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정작 지식생산(연구개발) 측면을 보니 미국 등 경쟁국에 비해 투자가 훨씬 적다는 이른바 '역설의 반전'이다. GDP 대비 연구개발투자에서 EU와 미국은 1.9% 대 2.6%.민간산업계만 따질 때도 1.1% 대 1.8%.게다가 증가율마저 미국에 뒤처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EU의 혁신시스템은 막대한 지식생산에 기초한 미국과 달리 곧 연료 부족에 봉착할 위험이 높다는 것이 버스퀸 위원의 경고다. 며칠 뒤 '유럽의 역설'은 블레어 영국 총리와 콕 네덜란드 총리가 공동으로 스페인 총리에 보낸 서한에서 다시 제기됐다. 이번 주(3월 15~16일) 바르셀로나 EU 정상회의 안건과 관련된 이 편지에 '유럽의 역설,그 처방전'이 첨부됐던 것이다. 유럽단일 연구ㆍ혁신지대망(ERIA)창설,민간 R&D투자 촉진,지식재산권 활용 제고,유럽연합 R&D 프로그램 개혁,산·학·연 네트워크 강화 등이 들어있다. 이와 함께 서비스산업의 혁신과 무형자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는 '유럽의 역설'이 아직까지도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버스퀸 위원의 '역설의 반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둘 모두 균형잡힌 지식기반경제를 지향한다는 점은 물론 같지만. '유럽의 역설'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일본이 한창 잘 나갈 때 미국이 느꼈던 '미국의 역설'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리고 당시 새로운 과학적 지식 생산에는 뒤떨어지면서도 상업화에 강했던 '일본의 역설'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 '일본의 역설'은 결국 일본 자신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 EU는 '유럽의 역설'을 극복해 나가면서도 자칫 '일본의 역설'에 빠지는 위험을 경계하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직면한 '한국의 역설'은 무엇이고,그 처방은 또 무엇인지 생각나게 만드는 일이다. 전문위원ㆍ경영과학博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