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렇게 용(龍) 문신을 새긴 '어깨'들이 급습해 오고 사무실엔 난데없는 칼춤이 난무한다. 감금 폭행은 다반사고 술병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요즘 유행하는 조폭 계열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놀랍게도 국민의 혈세, 공적자금이 빠져 나갔던 현장이다. 파산한 금융회사 직원들은 도덕적 해이를 넘어 파산관재인을 협박하는 등 파산절차 진행을 방해하고,일부이긴 하지만 진작 회사를 떠났어야 할 노동조합 간부들이 퇴직위로금을 달라며 파산관재인을 감금하는 사건도 일어난다. 파산한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은 돈을 갚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때로는 폭력배까지 동원해 파산관재인을 협박한다. 그것도 안되면 권력자까지 동원한다. 파산한 금융회사 주변에는 이처럼 공적자금을 거저 먹으려는 인간 군상(群像)이 득실댄다. 서울 을지로3가 신중앙금고빌딩 8층, S신용협동조합 파산재단 사무실. 40평 남짓한 공간 곳곳에 서류 상자들이 어지러이 널부러져 있고 어두운 조명 아래 파산관재인 김모씨를 포함한 다섯 사람이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뒤적이고 있다. 사무실이라곤 하지만 화분이나 거울 같은 장식물 하나 없다. 도자기 책꽂이 소파 등 가릴 것 없이 팔아치워 사무실은 그야말로 창고 같은 분위기. 김모 파산관재인은 "채권회수 활동을 열심히 할수록 파산재단이 빨리 문을 닫는다는 사실 자체가 딜레마"라고 말한다. 그는 "능력있는 보조인(직원)들은 떠났고 남은 사람들도 파산절차가 빨라질수록 회사를 빨리 떠나야 한다"며 "그래서 열심히 일하라고 독려하기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올 4월 파산한 S신협은 실무자가 91억원을 분식회계로 빼돌려 주식투자를 했다. 주식투자는 실패했고 S신협은 문을 닫았다. 예금보험공사는 돈을 찾으려고 아우성인 예금자들에게 예금을 대신 지급해 주고 S신협에는 김모 파산관재인을 보냈다. 김모 파산관재인의 주요 임무는 S신협이 대출해준 돈 2백53억원을 회수하는 일. 그러나 회사가 망하면서 그때까지 이자를 꼬박꼬박 내오던 대출자들조차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일부는 아예 '할테면 해봐라'로 돌변했다. 김 관재인은 "신협은 규모가 영세해 불법을 저지른 임직원들의 재산이 어디에 숨겨졌는지 기록을 제대로 남겨 두지 않고 있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보조인 도덕적해이 =파산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원'이라 불리지 않는다. 파산한 신협 신용금고 등에서 한때 직원으로 근무했던 이들에게는 '보조인'이란 명칭이 붙여져 있다. 공적자금 회수는 바로 이 보조인들에 달려 있다. 부산의 D파산재단에서는 일부 보조인들이 재계약에서 탈락하자 파산관재인 앞으로 수백통의 협박 편지를 보냈다. 협박 편지는 그나마 양반이다. 대구 K금고 파산재단에서는 노동조합 간부 8명이 퇴직 위로금을 주지 않는다며 파산관재인을 1주일동안 화장실에 감금한 희한한 사건도 발생했다. 회사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어 파산 절차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조인들이 태업으로 일관한다면 파산 종결까지 이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파산 비용도 많이 들게 된다. 멀쩡한 자산 부실로 =파산 관재인들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문제는 부실채권 회수. 파산재단이 보유한 자산 대부분은 부실 자산이나 다름없다. 멀쩡한 자산도 파산하는 그날부터 부실 자산으로 돌변한다. 경기도 D은행 파산재단 관재인은 아파트 중도금을 대출받은 모 방송국 PD로부터 대출금을 회수하려다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 대출금을 갚으라고 독촉하자 PD는 카메라를 동원해 재단 사무실을 취재하면서 방송에 내보내겠다고 협박했다. 대부분 자산이 이런 식으로 부실화돼 간다. 현재 D재단의 채권은 1백39억원 규모로 지금까지 45억원만 회수된 상태. 충청북도 S신협 파산재단은 여직원의 3천만원 횡령사실을 적발하고 회수에 들어갔다. 그러자 남자친구란 사람이 찾아와 온몸의 문신을 보여주며 여직원이 감옥에라도 가게 되면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3천만원을 배상해야 하는 여직원은 5백만원만 돌려준 채 버티고 있다. 관재인들도 문제 =파산재단 자체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지난 3월 예보가 직접 파산 관재인을 파견하고부터는 다소 나아졌지만 변호사만이 파산 관재인으로 나갈수 있었던 시절에는 도덕적 해이도 적지 않았다. 서울 지역을 포함한 10개 재단 변호사 10명이 파산재단의 골프회원권을 처분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다가 수시로 회원권을 이용한 사실이 감사원에 적발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파산 재단이 살아 있어야 계속해서 월급도 타고 골프장도 갈 수 있다. 파산 관재인이나 보조인(직원)이나 시간을 지연시키는 만큼 개인적으로는 이익이다. 도덕적 해이는 거의 필연적이다. 지난 3월부터 '변호사 단독 관재인' 제도가 바뀌어 예보에?공동 관재인을 파견하고 있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S종금 파산재단 A파산관재인은 재단 소유 골프장에서 골프를 쳐 온 공동 관재인 H 변호사에 대해 조사권을 발동하려 했지만 반발에 부딪쳐 불가능했다. A관재인은 하는 수 없이 예보에 보고했고 예보는 감사원에 이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관재인이 두 사람이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도 많다. 본업이 따로 있는 변호사 관재인들은 대게 1주일에 한두번 재단 사무실에 들른다. 그러니 보조인들을 관리할 업무 노하우도 없고 채무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자금을 회수할 이유도 없다.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는 "채권회수 실적에 따라 예보 파견 관재인의 하위 10%는 재고용을 하지 않는다"며 "파산 절차를 신속히 종결짓고 부실 채권에 대한 회수율을 높이는 것만이 공적자금을 낭비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