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시장의 X도매상가에서 캐주얼 의류를 판매하고 있는 K사장(42)은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그의 점포가 완전 난장판이 돼 있었다. 매장의 집기며 의류들이 몽땅 상가 바깥으로 내팽개쳐져 있었던 것. 그가 마음의 충격을 가라앉히는 데는 한참이 걸렸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짚이는 곳이 있었다. 상가운영위원회였다. 운영위원회측에서 전세로 장사를 하고 있던 그에게 아예 점포를 매입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실이 떠올랐다. 시세보다 훨씬 높은 요구가격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겠다'며 답변을 미룰 때마다 운영위원회측은 그에게 강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었다. 운영위원회가 '조직'을 동원해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온 것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K사장은 '등기 전환(점포 매입)'을 약속해야 했다. 같은 상가 3층에서 여성복을 취급하는 S사장(38)은 "K사장의 경우보다 더 황당한 일을 치렀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외환위기의 한파 속에서도 '신화'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동대문시장이 폭발적 성장세를 보였던 지난 99년. S사장은 바로 그 신화의 주역인 Q상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중국 러시아 등지의 보따리 장수 등을 대상으로 한창 '장사하는 재미'에 빠져 있던 어느날 상가운영위원회측에서 '상가 유지비' 명목으로 2천만원을 요구했다. '부당한 요구'라며 거부한 S사장에게 돌아온 것은 검은 양복차림 '어깨'들의 시도 때도 없는 린치와 영업 방해였다. S사장은 결국 몇 주일 못 버티고 점포를 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패션 메카'로 불리는 동대문시장이 조폭들의 횡포에 어느 정도로 시달리고 있는지는 최근 검찰에 구속된 D상가 상인 대표 K씨(38), N상가 대표 Y씨(45) 등의 사례를 통해서도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이들은 점포주들에게 폭력을 행사, 임대.관리권을 빼앗고 입점 상인들에게 권리금 명목으로 뒷돈(속칭 '피값')을 받는 등 각종 운영 비리를 저질러온 혐의다. K씨 등의 범죄 수법을 한마디로 말하면 '막무가내식'이다. 이들은 상가에 세든 상인들에게서 받은 1천만원 정도의 임대보증금과 월세만을 점포주에게 전달해 주고 자신들은 매년 5백만∼5천만원씩을 권리금 등의 명목으로 뜯어냈다. 이런 식으로 챙긴 돈이 수백억원대에 달했다. 폭력이 개입된 이같은 비리 때문에 창의력과 패기로 무장한 능력 있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하나 둘씩 동대문을 떠나고 있다. 이는 지난해 매출액 10조원, 수출이 19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대외경제연구원 김양희 선임연구위원) 국내 패션산업의 중심 동대문시장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실제로 마니아들 사이에 '문군 트렌드'를 유행시키며 '패션계의 서태지'로 통했던 문인석 사장도 이같은 동대문의 한계에 부딪쳐 최근 동대문 밀리오레에서 압구정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역협회 외국인 구매안내소의 고동철 소장은 "동대문시장이 주먹들의 손아귀 속에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투명하게 변신해 패션 메카라는 명성을 지켜 나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이학영 경제부 차장(팀장).김태철.김동민.조성근.최철규.송종현.이상열.오상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