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의 외자충격관리 (상) ] 9년째 일본무역상사에 다니는 피오리 알카야가씨(45).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신시가지인 프로비덴시야(서울 강남에 해당)에 있는 그녀 집에 들어서면 앞마당에 주차돼 있는 현대 소나타II 승용차가 눈길을 끈다. 널찍한 거실엔 대형 일제 소니 TV가 놓여 있고 주방에는 독일제 보쉬 냉장고와 세탁기가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올해로 결혼 20년째인 그는 조그만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남편 리카르도 콰드라씨(44)와 함께 연간 6만4천달러를 버는 칠레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다. 그의 집에서 칠레산 전자제품은 전자레인지를 제외하면 찾아볼 수 없다. 알카야가씨는 "70년대 시장개방 이후 '메이드 인 칠레(made in chile)'라는 개념이 사라졌다"면서 "칠레 소비자들에겐 외제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 생활속에 뿌리내린 글로벌 스탠더드 =칠레의 시장개방은 지난 74년 군사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피노체트 정권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됐다. 남미에서 가장 앞선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의 역사는 대형 쇼핑몰이 몰려있는 파르케 아라우코에서 바로 드러난다. 산티아고 신시가지의 아파트단지안에 자리잡은 이곳에는 백화점 3개, 쇼핑몰 1개, 슈퍼마켓 2개, 까르푸 점포 등이 들어서 있다. 매장마다 넘쳐나는 외국제품들은 시장개방 28년이 지난 칠레의 오늘을 대변하고 있다. 산티아고 택시에는 영수증 단말기가 달려 있다. 아무리 요금이 적게 나오더라도 택시기사는 반드시 영수증을 건넨다. 칠레 이민 생활 17년째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임병권씨(50)는 "조세체계와 회계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투명해 칠레에서 '탈세'라는 단어는 아예 생각할 수 없다"고 전했다. ◇ 제조업은 외국기업 차지 =칠레는 제조업이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대부분 외국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산티아고 북쪽의 아메리코 데스푸시오 공단에 잘리잡은 칠레의 토종 중소기업 마데곰. 수술용 장갑같은 고무로 된 의료용품을 만드는 이 회사는 시장개방 정책이 시작된 이듬해인 1975년 설립됐다. 마데곰의 로베르토 미라제스 이사(45)는 "피노체트 집권 초기 시장개방이 이뤄지면서 칠레 토종 제조업체들이 많이 문을 닫았다"며 "하지만 외국기업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은 높은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산티아고 상공회의소 조르지 레버 연구조사실장(38)은 "인구 1천5백만명의 칠레가 모든 산업을 키우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며 "풍부한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1차 산업에 핵심역량을 집중시키고 공산품은 철저한 시장개방을 통해 외국기업간 경쟁을 유발시켜 칠레 소비자들이 싼값에 질높은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 1차 산업과 유통업으로 승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칠레는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구리 등 광물자원이 매장된 북쪽 사막지대와 원목 농산물 등이 많이나는 남쪽 임·농업지대로 나뉜다. 또 태평양에 접해있는 길다란 해안선에선 수산물이 풍부하다. 이같은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칠레는 세계적인 광업회사인 코델코같은 1차 산업의 대표 기업들을 키워냈다. 하지만 1차 산업에도 외국자본은 진출해 있다. 호주의 BHP(광업) 영국의 유니레버(임업) 미국의 ASC그룹(어업) 등이 대표적이다. 조르지 레버 실장은 "1차 산업에서도 외국기업들은 가공기술과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노하우 전수에서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산티아고 거리를 걷다보면 의류 가전 신발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체인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전문 체인점들과 칠레 최대 유통그룹인 D&S는 외국자본에 맞서 국내 유통망을 굳게 지키고 있다. LG상사 김상천 산티아고 지사장은 "한국을 포함해 모든 외국기업들은 칠레 유통업체와 손잡지 못하면 시장 진입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라며 "제조업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외국상품에 대해 문을 활짝 열었기 때문에 유통망 장악을 통해 소비자들을 보호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산티아고=장경영 기자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