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국내 대형 조선업체인 A사의 한 설계부서. 선배로 보이는 직원이 젊은 사원들 앞에 도면을 펼쳐 놓고 무언가 열심히 지시하고 있었다. 젊은 직원들은 올해초 이 회사에 입사한 신입사원. 정식으로 근무를 시작한지 1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도 현업을 맡지 못한채 선배사원으로부터 설계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다. 대학에서 배운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얘기다. 이 회사의 L부장은 "조선공학과 출신조차 선박설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회사에 들어온다"며 "2~3년 정도 업무를 익히며 재교육을 받아야 설계업무를 맡길 수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기업들이 생산현장에 곧바로 투입할 만한 인력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 대기업 입사경쟁률이 웬만하면 1백대1을 넘을 정도로 대졸자들의 취업난은 심각하지만 정작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설명이다. 상아탑과 생산현장의 괴리는 지난 3월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주요국의 대학 경쟁력 순위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높다는 소리는 듣는다. 하지만 대학 경쟁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과 신흥공업국 18개국 등 47개국 가운데 최하위권인 43위로 평가됐다. 기업들은 직원들에 대한 재교육을 늘리고 현장의 이론을 대학교육에 접목시키기 위한 시도도 하고 있지만 대학사회의 보수성 때문에 여의치 않은 상태다. LG전자는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연구진을 대학에 보내 강의하도록 하고 커리큘럼 작성 때도 이런 저런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커리큘럼을 바꾸는데 소극적 자세를 보이는 등 대학들의 반응은 신통치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교수들이 기업을 방문해 커리큘럼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그 결과를 학과조정 때 적극 반영하는 미국의 대학과는 천양지차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국내 대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로 비즈니스 환경에 적합한 인재 양성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다는 점을 꼽았다. 미국의 경우 MBA(경영대학원) 로스쿨(Law School) 등 구체적인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인재양성기관이 있지만 국내 대학은 일반화된 학문분과로 체제가 편성돼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입사후 평균 1년6개월 정도는 재교육을 시켜야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이 만들져 그에 따른 비용부담도 엄청나다고 기업들은 하소연한다. 기업들이 최근들어 대졸 신입사원의 채용을 줄이고 경력사원 모집을 늘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경영환경이 워낙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대졸 신입사원을 뽑아 1∼2년 교육시킨 뒤 현업에 투입하는 방식으로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올해 3백20명의 직원을 선발한 이 회사는 이중 2백50명을 경력사원으로 채웠다. 신입사원 채용 규모는 70명에 그쳤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아예 대졸공채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대학교육의 질도 문제지만 양적 부족 현상도 심각하다. 예컨대 전기 전자 전산 전공자는 1년에 2만명 정도 배출되나 군미필, 대학원 진학,해외유학 등을 제외한 가용인력은 6천명 수준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수요는 삼성전자 한 회사만 2천여명에 달한다. 삼성SDI 삼성전기 삼성SDS 등 삼성의 다른 전자 계열사와 현대 LG SK 등을 합치면 그 수요는 1만명을 훨씬 넘는다. 때문에 삼성전자는 15∼20%는 재료공학이나 물리학을 전공한 인력으로 대신 채우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60년대에는 화학공학, 70년대에는 기계공학, 80년대 이후에는 전기.전자공학 등의 순으로 산업현장의 인력요구가 변해왔으나 대학에서는 커트라인만 바뀔뿐 정원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인력수급의 불일치는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IT산업 분야에서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도 정작 쓸만한 인력이 없어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채용인원을 줄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정부가 지원하는 재교육 역시 하향평준화된 인력만을 남발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권남훈 연구위원은 "정부가 IT인력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99년 이후"라며 "업계가 요구하는 고급인력이 제대로 공급되려면 적어도 4∼5년은 더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김태완 기자 twkim@hankyung.com ------------------------------------------------------------------ [ 특별취재팀=이희주 산업부장(팀장) 손희식 김태완 김홍열 강동균 정지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