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계양구 효성동에 자리잡은 풍산 부평공장. 고속프레스로 두께와 직경이 소수점 다섯자리까지 정확하게 도려지는 정밀금형을 통해 각종 금화와 은화가 미려한 색채를 뽐내며 쏟아진다. 금화와 은화는 지름 2mm의 수많은 구슬더미 속에서 이리저리 씻겨지며 맑은 빛깔을 낸다. 금 연 압연제품들을 옮기는 근로자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건조과정을 거친 동전은 속속 진공 포장된다. 내년 월드컵 기념주화용 소전(素錢:액면가와 그림이 새겨지지 않은 반제품 상태의 동전)이다. 풍산이 이 소전을 조폐공사에 넘겨주면 조폐공사는 소전의 표면에 무늬와 돈액수를 새겨넣어 월드컵 기념주화를 완성하게 된다. 풍산 소전은 세계 시장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월드베스트' 제품이다. 지난 1973년 대만에 첫 수출된 이후 지금까지 세계시장에 공급한 소전을 이어놓으면 지구를 38바퀴나 돌 정도다. 세계 40개국에서 25억명이 풍산 소전으로 만들어진 동전을 쓰고 있다. 미국 월가에선 풍산이 삼선전자 포항제철 등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한국의 대표적인 우량기업으로 꼽힐 정도로 이 회사는 밖에서 평판이 더 좋다. 지난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기념주화 공급을 계기로 세계 1위로 올라선 풍산은 현재 42%의 시장점유율을 보여 2,3위인 독일의 DN유로코인스(25%)와 영국의 로열민트(14%)를 멀찌감치 따돌린채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세계 최고 공인 =풍산은 지난 1998년부터 유로화 소전을 공급해 왔다. 이 소전으로 만든 유로화 동전을 내년부터 3억8천만명의 인구가 사용하게 된다. 유럽이 미국과 맞먹는 정치경제력을 구축하기 위해 단일통화체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풍산 소전은 명실상부한 '월드베스트'로 공인받게 된 셈이다. 그동안 유럽연합(EU)은 소전의 역내 조달방침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풍산이 1990년대초 바이메탈(두 종류의 금속을 외부 링과 내부 코어로 제작해 결합하는 방식)과 클래드(두 종류의 금속을 샌드위치처럼 압착 제작하는 방식)를 결합시킨 최첨단 주화모델을 선보인데 이어 1997년에 동합금 기술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노르딕 골드' 기술을 개발하자 자존심 강한 EU 조폐국들도 풍산의 소전을 구매하기로 방침을 바꾸게 된다. 특히 '노르딕 골드'는 기존 주화에는 없는, 동전위조를 못하게 하는 전기감지기능까지 있어 자동판매기의 위조주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EU 조폐국들의 근심을 덜어줬다. 고액주화인 1유로와 2유로 등 유로화 소전의 수출량은 총 3만5천t으로 풍산의 전체 수출물량의 12%에 이를 전망이다. 앞으로 동구권 등이 유로권에 가세할 예정이어서 풍산의 공급물량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조폐공사 기술연구소의 홍창석 선임연구원은 "풍산의 소전은 깔끔한 표면처리로 압인(소전에 숫자나 문양을 새기는 것)이 쉽고 내식성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며 "특히 일부 첨단기술은 특허권을 갖고 있고 세계시장 점유율에서도 워낙 앞서 있어 2,3위 경쟁사들이 쉽사리 따라잡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쟁력의 비결 =풍산은 주조에서 가공까지 일괄 생산체제를 구축한 거의 유일한 업체다. 1968년 창업 이후 비철금속 분야에서 줄곧 관련 다각화를 모색해 온데다 자체 금형 설계.제작 기술을 갖고 있어 원가경쟁력이 뛰어나다. 합금 용해.주조 기술과 압연 기술 역시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 풍산이 단기간내 유로주화의 동합금체계를 소화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세월동안 쌓아 놓은 기술과 노하우 덕분이었다. 바이메탈 소전의 경우 아르헨티나 인도네시아 태국 이란 대만 등에 공급하면서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다. 최고 경영자가 직접 영업일선에 나선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류진 회장은 매년 개최되는 세계조폐국장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 정보를 수집해 왔다. 한국유럽학회 명예회장인 수원대의 이종원 교수는 "소전은 일국의 화폐라는 특성과 각 국 중앙은행을 상대해야 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어 일반적인 마케팅으로는 국제 시장 진출이 어려운 품목"이라며 "최고경영진이 직접 나서 신뢰를 쌓은 것이 수출확대로 이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대박 예감 =풍산은 소전 생산물량의 80% 이상을 수출하고 있지만 지난 1997~1998년 외환위기때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소득이 줄자 사람들은 저금통을 헐기 시작했고 은행은 동전들로 넘쳐났다. 당연히 조폐공사의 소전 주문이 사라졌고 공장의 가동률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올들어 슈퍼마켓 백화점 등에서 비닐봉지 1장을 10~20원에 판매하고 담뱃값 고속도로통행료 등이 백원 단위로 인상되면서 동전 수요가 크게 늘었다. 이처럼 소전은 흐름을 잘 타면 '대박이 보이는' 분야다. 이 때문에 풍산은 세계 각국의 정부가 바뀌거나 통화체계가 변화되는 것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동시에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소전 수요의?봉?감안, 기왕이면 장기 공급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벌써 7년째 풍산으로부터 소전을 받고 있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