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조 LG전자 고문은 한국의 대표적인 전문경영인이다. 한국경제신문 창간 37주년을 맞아 지난 15일 세계적인 경영컨설팅회사인 타워스 페린의 박광서 한국사장이 LG 강남타워 이 고문 집무실에서 대담을 가졌다. 그는 "기업이 커지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에선 투자를 기대할 수 없다"면서 기업의 손발을 묶는 사회풍토부터 고쳐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고문은 다국적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우리기업들도 '글로벌 룰'을 적극적으로 채용해야 하지만 정치를 포함한 주변환경이 기업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측면도 많다고 지적했다. [ 대담=박광서 타워스 페린 한국사장 ] ------------------------------------------------------------------ △ 박 사장 =이 고문께서는 지난 1957년 LG에 입사한 이후 40년 이상 제조업 현장을 지켜왔습니다. 정보통신혁명이 전통산업의 사양화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얘기가 많은데 제조업의 비전을 어떻게 보십니까. △ 이 고문 =제조업이 사양산업이라는 얘기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지고 기술 서비스 등 소프트 재화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조업 자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제조업 부문에서도 소프트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제조부문의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돼 있습니다. 섣불리 제조업 비중을 줄이려 하다가는 경제 전체가 활력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제조업의 변화추세에 발맞춰 소프트 영역을 확대 접목하는 노력은 계속해야겠지요. 상대적으로 높은 인건비 비중을 줄이려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국내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만들고 생산비용이 낮은 해외시장에 활발하게 진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 박 사장 =반도체 자동차 가전 철강 등 모든 부문에서 세계적인 공급과잉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과잉이 해소되지 않으면 세계 경기도 살아나지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 이 고문 =공급과잉은 신기술 개발 속도가 소비자들의 수용 능력을 앞질렀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기술이 제품 수급에 대한 자율조절 능력을 상실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는 고전적인 수요-공급 이론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반도체 전자 자동차 등의 분야에서 상용화를 앞두고 있는 신기술이 너무도 많습니다. 소비자들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나오는 새 상품에 질릴 정도입니다. 기술이 구매를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구매시기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급과잉 문제는 쉽게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기업들은 한층 심화된 경쟁에 시달릴 것입니다. △ 박 사장 =요즘 기업문화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지면서 직장인들의 로열티가 예전같지 않고 조직문화도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업의 경쟁력에 어떤 영향을 줍니까.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 이 고문 =과거 상명하복형 톱-다운 방식의 조직은 네트워크 중심의 조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제조업의 소프트화와 인터넷 혁명이 이 변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조직에서 직장인들의 로열티가 떨어지고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업들은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경쟁력 향상을 위해 적극 수용하는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로열티가 떨어지는 대신 효율적인 업무와 비용절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 경영자는 개개인의 개성과 회사의 비전을 네트워크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 박 사장 =그렇다면 직장인들의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이고 처신은 어떠해야 합니까. △ 이 고문 =단지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과거에는 능력에 상관없이 성실하고 인간성이 좋으면 오랫동안 고용이 보장됐습니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조직 의존적인 마인드를 버려야 합니다. 직장인은 자신의 능력이 회사의 요구수준을 만족시키는지, 자신의 목표와 회사의 비전이 일치하는지 냉정하게 평가할줄 알아야 합니다. 직장인의 진지한 '자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 박 사장 =요즘 국내 기업인들중 눈여겨본 경영자가 있습니까. △ 이 고문 =이 시대는 '영웅을 죽이는'시대인 것 같습니다. 눈에 띄는 기업인이 별로 없습니다. 변혁기일수록 열정과 카리스마, 비전을 동시에 갖고있는 최고 경영자가 필요한데 우리의 기업환경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눈 앞의 단기적인 이익을 쫓는 데만 급급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먼 장래에 대한 확신과 소신을 갖지 못하는 분위기에서는 좋은 기업인이 나올 수 없습니다. △ 박 사장 =우리나라는 여전히'규제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데요. 기업들에 꼭 있어야할 규제는 어떤 것이고, 없어도 되는 규제는 무엇입니까. 나아가 정부의 대기업 정책은 어떠해야 합니까. △ 이 고문 =시장 실패를 막기 위해 정부의 규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기업활동에 대한 룰을 명시함으로써 '예측 가능한 미래'를 설정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요즘 문제가 되는 규제들은 대부분 대증요법에 치우친 것들입니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핵심은 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덩치를 키워야 하고 덩치를 키우는 것이 바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커지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러니까 대기업들이 투자의욕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얘기입니다만 외환위기 이후 천편일률적으로 강요된 부채비율 2백%도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초래했습니까. 엄연히 경쟁상대가 있는 시장에서 시한을 정해놓고 재무구조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업들의 손발을 묶어두겠다는 발상입니다. △ 박 사장 =최근 GM이 대우차 인수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등 많은 다국적 기업들이 국내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내수시장에서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기업들도 무척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대응책을 말씀해 주십시오. △ 이 고문 =다국적 기업과 경쟁하려면 경영의 투명성, 사고의 유연성, 의사결정의 합리성, 공정한 경쟁 등의 '글로벌 룰'을 갖춰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기업의 잘못도 있지만 기업환경을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적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 박 사장 =요즘 많은 벤처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말씀 해주십시오. △ 이 고문 =벤처기업들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핵심역량이 아니라 바로 마케팅 능력입니다.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으면 뭣합니까. 소비자들에게 전달이 돼야지요. 우수 벤처기업의 기술과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이를 마케팅으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애써 개발한 신기술을 강력한 마케팅 능력을 가진 해외 다국적기업들에 헐값으로 매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전략적 공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해외시장 활로는 대기업이 뚫고 벤처는 본연의 핵심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협력한다면 한국 기업 전체의 역량이 한단계 높아질 것입니다. △ 박 사장 =국내 기업들은 대미 수출 의존도가 유난히 높고 미국시장은 경쟁도 치열합니다. 수출다변화를 위한 방안은 없겠습니까. △ 이 고문 =특별한 방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미 국내시장이 개방돼 다국적 기업들과 경쟁을 하고 있는 판국에 어디에선들 해외 기업들과 마주치지 않겠습니까. 미국시장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다만 개별 기업들은 마케팅 전략 차원에서 시장을 다변화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 ------------------------------------------------------------------ < 이헌조 고문 약력 > 1932년 경남 의령 출생 1952년 서울대 철학과 입학 1957년 락희화학공업(LG화학의 전신) 입사 1967년 (주)럭키 상무 1976년 국제증권(LG증권의 전신) 사장 1984년 럭키금성상사(LG상사의 전신) 사장 1990년 한.독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1993년 금성사 대표이사 부회장 1995년 LG전자 대표이사 회장 1996년 LG인화원 회장 1998년 LG전자 고문 저서 : '커뮤니케이션의 유토피아'(1997년) '이헌조 경영담론집(1~4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