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한국 경제에서 어떤 존재인가. '기관차'인가, '문어발'인가. 한국의 대기업들은 이 두 극단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돼 왔다. '기관차' 쪽에 가까운 평가를 받을 때도 없지 않았지만, 경제가 어그러진다 싶을 때면 어김없이 문책의 화살을 받았다. 문어발식 확장 경영으로 자원배분을 왜곡시켰다는 등의 날이 선 비판이 뒤따랐다. 외환위기의 한 복판에서 출범한 현 정부의 경제 키워드가 된 '개혁'과 '구조조정'은 대기업을 수술 대상의 1순위로 올려 놓았다. 기업들은 많은 것이 부정됐다. 폐기된지 오래였던 공정거래법 출자총액한도 제한조치가 부활됐고,부채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묶어둬야 한다는 새로운 족쇄까지 채워졌다. 기업 경영을 기업인들에게 그대로 맡겨둘 수 없다는 '기업 성악설'이 짙게 배어났다. 정부는 그러면서 '글로벌 스탠더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개혁과 구조조정의 대원칙으로 제시했다. 탐욕스런 기업인들의 문어발 확장심리와 투명치 못한 내부거래 등의 경영관행을 구미(歐美)식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뜯어고치고, 시장경제의 잣대로 기업간 경쟁을 부추겨 자연스레 구조조정을 유도하겠다는 얘기였다. 반도체 석유화학 등 몇몇 업종에서는 기업간 경쟁을 '시장 실패'로 규정하고 정부가 빅딜이라는 이름의 '교통정리'를 서슴지 않았다. 현 정부가 출범한지 3년 반이 넘은 지금, 정부가 수없이 다짐했던 개혁과 구조조정의 달콤한 열매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빅딜'이 강요됐던 반도체 등의 업계는 경기 침체의 유탄까지 받아 헤어나기 힘든 부실의 함정에 빠졌다. 이들 업종 뿐 아니다. 출자총액이 순자산의 25%를 넘을 수 없고, 차입금을 자기자본의 2백% 이내에서 관리토록 운신을 구속당한 대기업들은 세계적인 경기 한파를 돌파해낼 신규 투자를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 그 결과 작년 11월 이래 10개월 연속 기업 설비투자가 뒷걸음질치고 있지만, 기업들의 눈 앞에는 '현실'보다 중요한 '이념'의 벽이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을 뿐이다. "대기업의 신규사업 진출을 문어발식 확장이라고 몰아붙여 금지했더라면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기업으로 성장하고, 현대자동차가 미국내 빅7의 하나로 떠오르며, SK가 세계적인 통신사업자로 부상하는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최병일 이화여대 교수)이라는 지적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뿐이다. "현 정부가 추구하는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은 사회주의적 평등의 '이념'과 '명분'에 포획돼 있다"(민병균 자유기업원 원장)는 지적은 최근 정부가 대기업의 출자총액 및 은행 소유지분 제한에 대한 규제완화방안으로 내놓은 "한도는 폐지하되 초과분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박탈한다"는 대목에서 완연하게 드러난다. 현실성없는 과잉 규제를 더이상 버틸 도리가 없게 되자, 시장경제의 근간인 사유재산권을 교묘하게 부정하는 꼼수로 '무늬뿐인 규제완화'를 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 정부의 기업정책은 한마디로 좌표가 잘못 설정돼 있다는 '시장으로부터의 목소리'가 이제는 정당한 응답을 받아야 한다. 관료가 기업을 지배하는 도치된 사회, 시장개혁 아닌 관료 경찰국가로 전도됐던 유럽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담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 기업인들에게 기업을 돌려줘야 기업이 살고,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산다는 시장경제의 단순한 명제를 되새길 때다. 이학영 기자 haky@hankyung.com --------------------------------------------------------------- [ 특별취재팀 = 이희주 산업부장(팀장) 이학영 손희식 김성택 김태완 이심기 오상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