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동시다발 테러사건으로 국제 금융계의 향후 움직임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일본 은행들의 불량채권 처리 작업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일본 굴지의 대형 유통그룹 "마이칼"은 지난 14일 오후 주채권은행들의 자금지원 중단으로 정상 경영이 불가능해졌다며 도쿄지방재판소에 민사재생법 적용을 긴급 신청했다. 민사재생법은 파탄상태 직전의 기업들이 경영재건에 나설 수 있도록 도산처리 수속을 밟을 수 있게 규정한 법률로 한국의 화의제도와 비슷한 효력을 발휘한다. 일본 소매업 매출 랭킹 4위의 마이칼 그룹은 1조7천4백28억엔의 부채를 안고 있으며 주채권은행인 미즈호그룹으로부터 14일 오전 자금줄 폐쇄 통보를 받았다. 마이칼 그룹의 부채 규모는 태평양전쟁 패전후 지금까지 56년간 무너진 일본기업들 중 5위에 해당한다. 유통업체로는 지난해 7월 11일 도산한 소고백화점그룹(부채 1조8천7백억엔)에 이어 두번째다. 일본 언론과 금융계는 마이칼 도산이 일반 기업들의 부도와 크게 구별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마이칼 도산이 구조개혁을 강조해 온 고이즈미정권 출범 이후 첫 번째 대형 파탄이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신속한 불량채권 처리를 다짐하면서도 채무자인 기업에 끌려 다녔던 일본 정부와 은행들이 악연의 고리를 끊겠다고 결심한 것이 마이칼 도산으로 나타났다는 분석이다. 일본 정부와 은행들의 급격한 태도 변화는 미국과 세계 경제를 덮친 동시다발 테러의 충격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주가 및 달러화 폭락으로 세계 경제가 요동친 이상 혼란이 더 이상 가중되기 전에 일본 경제의 뇌관부터 빨리 제거해야 되지 않겠느냐는데 인식을 같이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불량채권의 속내용과 처리 속도를 놓고 미국, IMF(국제통화기금)등으로부터 의심과 비판을 받아온 터에 잘못하면 일본이 전체 세계 경제를 망쳤다는 불명예를 뒤집어쓸 가능성을 감지한 것이다. 실제 일본 경제팀의 간판스타인 야나기사와 하쿠오 금융상과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재정상,히라누마 다케오 경제산업상은 도산 발표일인 14일 아침 긴급 모임을 갖고 세계 경제의 긴박한 변화와 마이칼 처리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칼 도산이 시사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건설,부동산,유통등 일본 증시의 3대 골칫거리업종에서 대형 도산이 꼬리를 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의 간판 유통그룹 다이에는 부채만도 2001년 2월말 기준, 2조5천6백40억엔에 이르고 있으나 2조9천억엔 매출에 경상이익은 단 10억엔에 그쳤다. 다이에 주가는 14일 1백79엔으로 끝났다. 불량채권 처리는 일본 경제의 기본 운용방향에도 큰 변화를 요구할 개연성이 크다. 고이즈미 정권은 불황과 고통을 전제로 한 긴축예산을 고집하지만 이코노미스트들은 불량채권 처리로 구멍이 날 은행금고(자기자본)는 공적자금으로 메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업도산은 현재 5%인 실업률을 더 끌어 올릴 것이 분명해 재정출동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게 돼 있다. 일본의 경기침체에 우려를 표명해 온 서방선진국들이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경기정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일본에는 짐이다. 노인정치가들이 판치는 일본은 공적자금 논쟁 만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등 우유부단으로 불량채권 처리를 미뤄 왔다. 하지만 테러사건 충격과 선진국들의 신속한 공조는 일본을 한가한 제3자 입장에 안주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있다. 경제체력에 걸맞는 국제적 책임을 회피한 채 환부를 키워 온 일본에 미국 테러사건은 "발등의 불"로 다가왔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