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흔들리고 있다. 계속되는 경기 부진으로 세계 경제의 기관차 역할에 제동이 걸린 상황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테러 참사까지 당하는 등 국방 및 보안에도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막강한 첨단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의 경찰'을 자임해 온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가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백악관과 미 의회를 축으로 한 '워싱턴 컨센서스'로 세계 정치 및 경제 질서를 좌우해 온 '팍스 아메리카나'의 1백년 가까웠던 '질주'에 마침표를 찍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까지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가 플로리다에서 테러 소식을 접하고도 10시간 이상 백악관으로의 복귀를 미뤘던 데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다. '유약한 지도자'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고개를 드는 모습이다. 부시 대통령은 사고 당일 오후 늦게 백악관으로 돌아와 "연방정부는 건재하다"며 국민들을 진정시켰지만 정치 경제의 심장부를 강타당한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는 1980년대 이후 자주 거론돼 온 이슈다. 1987년 영국인 학자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의 쇠퇴를 예고하면서 일반인들의 관심사로 급부상했다. 상대적이긴 하지만,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절정을 구가했던 2차대전 직후에 비해 크게 약화된 상태다. 세계 총생산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몫은 1950년대 30%를 넘었지만 지금은 20% 안팎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에 대한 우려는 1991년초 걸프전쟁에서 미국이 주도한 다국적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면서 잠시 사그라드는 듯 했다. 당시 조지프 나이 교수는 '21세기 미국의 파워'라는 책에서 "여러 면에서 미국을 대체할 힘은 없으며 미국은 현재도 결코 쇠퇴의 길에 있지 않고 과거와 같은 경제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정보화시대의 선두주자인 데다 국가간의 상호의존성이 더욱 높아가는 시대이기 때문에 지도국의 역할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정보기술(IT) 산업을 중심으로 미국 기업이 뿜어내는 경쟁력은 1990년대 후반 세계 증시를 떠받쳐 온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지난해 하이테크 경기의 거품이 꺼지면서 미국이 맡아 온 세계 경제의 기관차 역할도 고장났다. 지난 2·4분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가까스로 벗어나 0.2%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정치 외교나 방위 분야에서 미국이 점하고 있는 지도력에 대한 도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각종 분쟁에 사사건건 개입해 온 미국에 대한 각국의 반발은 여러 곳에서 반미(反美)테러 행동으로 표출돼 왔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우방국들도 외면하는 미사일방어체제를 힘으로 밀어붙이고 유엔기후협약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는 과정에서 독선적인 외교정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세계 인권의 파수꾼을 자임해 온 미국이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이번 테러는 독선적 강경노선을 고집하며 '신 고립주의' 양상마저 보여 온 부시 행정부에 분명 크나큰 시련이다. 연방청사는 12일 업무를 재개했지만 미국 국민들은 처참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미국 국력의 상징이었던 세계무역센터·펜타곤의 붕괴와 함께 미국의 국기(國基) 마저 무너졌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워싱턴=고광철 특파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