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문제의 "빅딜"을 다룰 준비가 됐다. 대우를 말하면서 빅딜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는 법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빅딜은 처음부터 김우중 회장의 그랜드 플랜이었다. "빅딜이 민간자율로 추진되었다"는 이헌재씨의 주장은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빅딜은 동시에 정부가 추진했던 것이기도 했다. 압력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다양한 중재안의 상당부분은 정부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98년과 99년 두해동안 경제계를 뒤흔들었던 빅딜문제 전체를 다룰 생각은 없다. 우리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대우다. 위기를 기회로 돌려 놓는 것은 김 회장의 타고난 장기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빅딜에서의 상대방은 노련한 삼성그룹이었다. 삼성은 정신없이 빅딜 게임에 휘말려 들어갔으나 끝내는 "법정관리와 사재출연"이라는 절묘한 탈출구를 뚫고 활로를 열었다. ● 이른 봄 99년 3월 초. 주가도 오르고 경제도 조금씩 풀려가던 이른 봄이었다. 최홍건 산자부 차관실에서 삼성 구조조정 본부로 전화가 걸려왔다. 과천 청사로 와달라는 요지.A임원이 즉각 과천으로 달려갔다. 다음은 그의 증언. "대우와 얘기가 잘될 것 같으니 김 회장을 직접 만나서 결말을 지어달라는 것이었어요. 한참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번에는 국회에 나가있던 박태영 장관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박 장관은 '삼성차는 아무래도 대우에 넘겨야 할 것 같다. 김 회장을 찾아가 의견을 맞추어달라.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는가'하는 요지였죠" A씨는 회사에 돌아와 정부의 요청을 설명하고 바로 대우센터 25층 김우중 회장 집무실을 찾아갔다. 집무실에 들어선 A씨는 적잖이 당황했다. 김 회장은 책상 위에 얹어놓은 다리를 내리지도 않은 채 인사말도,앉으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공손하게 대하는 김 회장의 평소 모습과는 달랐다. 빅딜 합의문을 작성한 지 석달이 지나고도 아무런 결론이 없었으니 김 회장의 얼굴이 굳어있을 만도 했다. A씨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 회장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긴 했소?" "그렇습니다" "내 한마디만 하지"라며 김 회장은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일이 안 돼요. 조건 없이 주고받아야지" ● 삼성의 딜레마 사실 삼성은 벌써 1년째 두가지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는 신정부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였다. 새정부는 오랜 야당생활 끝에 집권한 터였다. YS 집권 이후 현대그룹이 어떤 '불이익'을 받았는지 익히 보아온 삼성이었다. IMF 사태를 맞기도 했지만 정부로부터 날아올지도 모를 각종 금융제재에 대비해 4조5천억원의 현금을 마련한다는 극비 자금계획을 작성했던 삼성이었다. 때문에 삼성직원들은 97년도 연말 상여금을 한푼도 받지 못했다. 삼성자동차 문제는 더욱 골치아픈 문제였다. 삼성은 98년10월에 있었던 기아자동차 입찰에 실패하면서 어떻게든 삼성차를 정리해야할 입장이었다. '일류 삼성'의 신화가 흔들리고 있었다. ● 98년 가을 대우가 삼성그룹에 자동차 빅딜을 정식으로 제안한 것은 98년 11월 하순이었다. 길거리는 노숙자로 넘쳐나고 언론들은 다가오는 혹한을 경고하던 시절. 삼성의 이학수 사장(당시 회장 비서실장)과 김태구 대우차 사장이 회동했다. 김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삼성차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빅딜방식으로 삼성차를 처리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대우는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김 사장은 처음에 대우건설을 내밀었고 나중에 대우전자를 제시했다. 이렇게 삼성차와 대우전자 빅딜은 막이 올랐다. 사실 삼성과 대우간 빅딜은 삼성자동차가 처음은 아니었다. 김우중 회장은 이미 98년 초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중공업 인수의사를 밝혔던 터였다. 삼성 고위관계자의 증언. "정확한 배경은 모르겠지만 이 회장은 처음엔 삼성중공업을 대우에 넘기는데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삼성중공업의 적자가 많아 내부적으로 구조조정의 필요성도 있었다고 봐야죠" 대우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사업영역이 중복되는 치열한 경쟁자였다. 두 회사의 수익구조가 나빠진 것도 저가 출혈경쟁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성중공업에는 다른 해법도 있었다. 결국엔 볼보사에 굴삭기, 클라크사에 지게차를 매각했고 조선경기가 되살아나면서 극적으로 회생했다. 기업인수의 달인(達人) 김 회장의 생각은 그러나 달랐다. 당시 조선협회 임원이었던 B씨의 증언. "조선업은 수주계약를 하면 계약금액의 20%를 선금으로 받아요. 김 회장이 노린게 이 대목이었을 겁니다. 늘어난 도크 설비를 앞세워 대규모 수주를 한 뒤 이 자금을 돌려쓰는 겁니다" ● 12월7일 자동차 빅딜논의가 가능했던 것은 98년10월12舅?기아자동차 입찰실패 때문이었다. 먼저 삼성이 탈락했다. 1차 입찰에서 경쟁업체들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했지만 부채탕감을 요구하면서 자격미달로 탈락했다. 이 사건은 삼성 내에서 지승림 기획팀의 몰락과 이학수 재무팀의 부상을 가져왔다. 대우는 6천억원 차이로 현대에 고배를 들었다. 양쪽 다 활로가 절실했다. 김태구.이학수 회동으로 빅딜은 속도감이 붙었다. 김태구 사장의 보고를 받은 김 회장은 그길로 청와대로 달려가 김 대통령에게 삼성차와 대우전자의 빅딜을 보고했다. 11월29일이었다. 지금부터는 협상이었다. 삼성은 아직 빅딜이냐 퇴출이냐를 고심하고 있었지만 12월7일로 정해진 정.재계 간담회를 목전에 놓고 마냥 미룰 수도 없었다. 김태구 사장과 이학수 사장은 12월6일 롯데호텔에서 밀고당기는 협상을 계속했다. 빅딜은 삼성에게도 심각한 대안이었다. 어느 정도의 자금출혈도 각오한 터였다. 7일 아침이 밝았다. 정.재계 감담회 발표문에 자동차.전자 빅딜을 포함하느냐 마느냐는 것은 오전까지도 확정되지 못했다. 당초 오후 2시에 배포 예정이던 보도자료는 계속 늦추어졌다. 분위기는 강압적이었다. 삼성은 결국 오후 5시 청와대 간담회 직전에야 합의문에 사인했다. 합의문에는 '삼성그룹의 자동차부문을 대우의 관련기업으로 이관하고 대우그룹의 전자부문을 삼성의 관련부문으로 이관하기 위한 실행계획을 12월15일까지 확정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실행계획은 A임원이 김 회장 집무실을 찾아갔던 3월 초에도 그 이후에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 특별취재팀 =정규재 경제부장(팀장) 오형규 이익원 최명수 조일훈 김용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