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패망 2년이다. '유동성 확보 방안'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해체작업이 발표된 것이 99년 7월19일이었으니 내일로 꼭 2주년이다. 재계 2위로까지 대우를 밀어올렸던 '세계경영'이 허무한 종말을 맞았던 날. 세상은 대우를 잊었지만 원념의 세월을 잊지 못하는 사람은 더욱 많다. 금융산업은 아직도 대우망령에 사로잡혀 있고 대우자동차는 2년째 '세일중(on-sale)'의 간판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은 큰 바다를 향해 새로운 항진을 시작했고 '기계' 역시 가속도를 붙이며 정상화의 바퀴를 굴리고 있다. 과연 대우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배웠는가….외환위기에 이어 또 하나의 충격파를 몰아왔던 그해 여름의 숨가빴던 날들을 정리한다. 거슬러 가면 당대 최고였던 한 곡예사에 관한 전설이 있다. 작은 막대 끝에 하얀 접시를 올려 절묘한 솜씨로 가속도를 붙여갔고 하나의 접시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금세 새로운 접시를 돌려가며 관중들을 사로잡았던 그 사람. 꼬챙이는 길게 열을 지었고 열이 길어질 때마다 전설의 곡예사는 더욱 부지런히 이쪽저쪽으로 뛰어다녀야 했던…. 지금 우리는 이 전설의 곡예사와 그가 빈 손에서 장미를 피워냈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전직 대우그룹 회장이며 전경련의 대표였으며 '세계는 좁고 할 일은 많았던' 바로 그 사람. 베이징의 접시, 폴란드의 접시, 서울의 접시, 우즈베키스탄의 접시,아프리카의 위태로운 접시들…. 이 모든 것들을 돌리기 위해 비행기를 갈아타고 새우잠을 자가며 세계를 누비고 다녀야했던 한 고단한 인생과 그가 세우고 무너뜨렸던 것들에 대해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 '다만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호교론(護敎論)에서부터 '처음부터 진정한 기업인이 아니었다'는 가혹한 비판까지 찬반의 스펙트럼은 길게 펼쳐져 있다. '국민의 정부'가 추진했던 구조조정의 음모에 걸려들었다는 주장에서부터 불가사의한 무리수들의 종착역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예정된 실패'로 치부하기에는 지나간 그 모든 아련한 성공의 기억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사실 맨주먹으로 일어서서 세계를 도모하기를 꿈꾼 자에게 누가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대우그룹 몰락 2년을 맞아 바로 그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야기는 정확히 2년 전, 1999년 그 무더웠던 여름으로 거슬러간다. [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