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수출주력 상품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섬유산업이 일대 붕괴위기를 맞고 있다. 중소.영세업체가 몰린 "섬유의 메카" 대구는 잇단 공장 폐쇄로 분위기가 흉흉하다. 효성 고합 태광산업 등 대형 화섬업체들이 있는 울산 공단에선 설비합리화를 놓고 노사가 벼랑끝 대치를 하고 있다. 세계 섬유시장은 공급 과잉이다. 게다가 저임을 앞세운 경쟁국들이 선발개도국의 몫을 앗아가는 양상이어서 한국 등은 점차 설 자리가 없어지는 추세다. 일본 대만 등은 이미 구조조정을 완료했거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으나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합리화를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 신음하는 섬유의 메카 ='대구지역 섬유 기반이 무너지면 한국 섬유산업엔 미래가 없다' 대구 성서공단과 염색공단에 있는 직물.염색 등 섬유업체 종사자들은 한결같이 "제품 주문이 끊겨 공장 가동을 멈추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다"며 "하반기 경기회복 운운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걱정했다. 대구.경북지역의 섬유산업이 전체 섬유업계에서 차지하는 생산 비중(합섬직물 기준)은 78%. 대구에선 섬유업종이 생산과 고용에서 40%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섬유는 건설업과 함께 영남경제권을 키워온 효자 산업이었다. 그러나 고급 옷을 사입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의 경기가 침체로 기울면서 수출로 먹고 살아온 영남권의 섬유업체들은 사상 최악의 불경기에 직면, 구조조정을 해야 할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대구 경기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통계로 대구염색공단 열병합발전소의 월간 스팀 공급량이 있다. 직물.염색업체 등이 공장을 돌리기 위해 공급받는 스팀량은 올초 20만t에서 지난달 18만t으로 줄었다. 감소폭이 아직은 크지 않으나 발전소측은 "기존 설비와 인력을 어찌할 수 없어서 가동하는 업체가 상당수여서 경기침체 상태가 지속되면 공급이 급감할 것"이라고 전했다. ◇ 악순환 고리에 얽힌 섬유업계 =중국 미국 대만에 이어 세계 4위의 섬유 강국을 자처해온 한국 섬유산업은 △공급과잉 △노사분규 △통상마찰 등 구조적인 난관에 부닥쳤다. 태광산업 대한화섬 고합 등 대형 화섬업체의 파업이 한달째로 접어들면서 이들 업체로부터 화섬 원사를 공급받는 직물업체들이 가동중단 위기에 직면했다. 섬유업계 전체가 '공장가동 중단.축소→수급 불균형→제품가격 상승→수출 타격' 등 악순환의 고리에 얽혀들었다. 태광산업(매출손실 1천2백억원) 고합(1백억원) 효성(7백59억원) 등은 구조조정에 나섰다가 노조 파업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는 중상(重傷)을 당했다. ◇ 불황 타개책은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달 19일 대구 섬유센터에서 대구경북견직물협동조합 주최로 열린 '화섬직물 불황대책' 회의에서 김대균 서광물산 사장 등 업계 대표자들은 산업자원부 및 지방자치단체, 연구기관 관계자들에게 대책 수립을 촉구했다. 회의 결과 불황대책 태스크포스(간사 장해준 대구경북견조 상무)가 발족되고 중국 등 경쟁국과의 협력 방안, 산업용 섬유 확대 방안 등이 도출됐다. 업체 관계자들은 "당장 문을 닫을 판인데 밀라노 프로젝트 같은 장기 계획이 피부에 와 닿겠는가"라며 공동마케팅회사 설립과 같은 대책을 세워달라고 주장했다. 한국섬유개발연구원 문인곤 원장은 "품질경쟁력을 갖춘 업체만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며 "밀라노 프로젝트를 통해 경쟁력을 높인 리딩업체 20%가 나머지 80%의 영세업체들을 선도하는 방향으로 시장이 개편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