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저녁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명동 은행회관 집무실에서 색다른 손님들을 맞았다.

토머스 번 한국담당 국가신용평가국장 등 방한 중인 미국 신용평가기관 무디스의 관계자들이었다.

장관이 직접 이들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외국인들을 배려해서 과천 청사가 아닌 서울 시내에서였다.

진 장관은 이 자리에서 "한국 경제 상황이 여러 측면에서 나아지고 있다.

이것이 국가 신용평가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무디스쪽에서는 장관의 개인적인 경제관이나 한국 경제를 보는 시각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에 정부 고위인사들이 국제신용평가회사 직원들을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재경부 모 국장은 "장관이 시내에서 이들을 대접하다니 ''격세지감''이 든다"고 말했다.

진 장관과 무디스 관계자들의 만남은 글로벌파워가 관료사회에 주는 충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 재무부 시절엔 이재과장이 신임 시중은행장 취임식에서 장관 축사를 대독할 정도로 ''관료끗발''이 셌다.

작년 미국으로 넘어간 제일은행의 호리에 행장 취임식에 재경부측 참석자는 없었다.

''관치관행''을 없앤다는 취지도 있었지만 장관 대신 참석할 직급선정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요즘엔 재무부로 찾아오는 은행사람들도 거의 없다.

외국계은행은 물론이고 국내은행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말 연기금 주식 투자를 위해 재부무 금융정책국장이 담당 기관 사람들을 설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담당 국장이 이를 주재하는 자리인데도 몇몇 기관은 빠졌다.

외국계는 물론 없었다.

재경부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아예 초청공문도 발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년 전만 해도 담당과장이 주재하든지 협조공문을 띄우면 ''일사천리''식으로 처리될 수 있는 사안이 요즈음 ''통사정''을 해도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다고 재경부 공무원들은 푸념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이라는 전제 아래 금융시장 개방이 급진전되고 있습니다만 마음 한켠엔 외자에 종속되는게 아닐까라는 우려를 씻을 수가 없다"(재경부 모 사무관)

금융당국의 위축감이 커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 토종은행들의 당국에 대한 불만은 여전하다.

"외자계에는 꼼짝도 못하면서 토종은행들만 상대로 여전히 ''골목대장''으로 군림하려 한다"고 국내은행 사람들은 불평한다.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의 회사채 인수에 강제로 은행들을 참여시키는가 하면 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에 대해선 직원들의 급여까지 통제한다.

시중은행의 임원급 인사에 재경부가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외경제연구원의 황상인 박사는 "정부간섭을 거의 받지 않는 외자계은행의 시장잠식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토종은행에 대한 경영자율화(정부간섭 배제)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안팎에서 ''무장해제'' 압박을 받고 있는 셈이다.

시장 정보 갈증은 경제관료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애로사항이다.

외자계가 늘어나면서 정책입안을 위한 기초자료 협조를 받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과거엔 전화 한 통이면 자료를 직접 들고 뛰어왔는데 외자계 중에는 본사지침 등을 핑계로 각종 자료나 통계를 잘 주지 않는 데가 많다. 시장정보가 모자라니 정책 실효성에 자신이 없어진다"(재경부 모 과장)

"과도기이다. 자유화 개방화에 따른 금융시장의 완전 경쟁체제가 아직 자리잡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정부가 주도하는 경제는 더욱 아니다. 정부의 딜레마는 갈수록 커져가고 있다"(K국장)

극단적으로 행정입법으로 법 제도만을 만들거나 집행하는 단순 기구로 전락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사정은 금융감독원도 마찬가지다.

"외자기업들은 지나치게 주주이익과 수익성만 강조하고 있어 전체 금융시장의 안정측면에서 해를 끼칠 수도 있다"(금감원 L국장)

기획취재부 오춘호.조일훈.장경영 기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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