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ADSL모뎀 입찰에 참여했던 통신장비업체 K사의 N사장은 걱정이 태산이다.

단지 수주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IT(정보기술)업계가 ''모두 죽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K사의 응찰금액은 22억원.

N사장은 이례적으로 원가를 써냈다.

그런데 S사가 8억원을 제시해 일감을 가로채 버렸다.

N사장은 "매각을 추진 중인 S사가 매출을 부풀리기 위해 턱없이 낮은 금액을 써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문제는 이번뿐이 아니고, 더구나 ADSL 모뎀뿐만도 아니라는 점이다.

IT산업 각 부문에서 서바이벌게임을 연상시키는 출혈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원가를 밑도는 덤핑 응찰이 부쩍 늘었고 이른바 ''뜨는 업종''에 수많은 업체가 달려들어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수출도 예외가 아니다.

셋톱박스 업체인 M사의 K사장은 최근 미국을 다녀온 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미국 바이어는 K사장에게 한국 업체들이 제시한 수많은 셋톱박스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각 제품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가격들이 적혀 있었다.

K사장은 "귀사는 얼마에 공급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맥없이 물러나왔다.

K사장은 "사업을 하다 보면 전략상 원가를 밑도는 가격에 수주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며 덤핑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값을 후려칠 때는 시장을 선점하거나 본전을 뽑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요즘엔 망하게 될 줄 뻔히 알면서도 하루라도 연명하려고 터무니없는 값을 제시하는 업체가 너무 많다"고 개탄했다.

IT업계에 과당경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최근 1,2년새 수많은 업체가 이 분야에 뛰어든 반면 경기침체로 수요는 위축됐기 때문이다.

셋톱박스의 경우 아직 시장형성단계에 머물고 있는데도 유망하다고 알려져 4백개가 넘는 기업이 뛰어들어 싸우고 있다.

정보보호업계도 연간 1천억원에 불과한 시장에서 2백여개 업체가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인터넷데이터센터(IDC)를 운영하는 업체들은 고객 기업들이 쓰러지고 경쟁사가 늘자 요금을 절반 이하로 깎아주는가 하면 상당기간 돈을 받지 않겠다는 파격적 조건을 제시하며 경쟁사 고객을 빼가기도 한다.

이처럼 출혈경쟁이 심화되면서 우량기업들마저 벼랑으로 몰리고 있어 문제다.

우량업체들은 덤핑으로 맞서기도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지켜볼 수도 없어 한숨만 짓고 있다.

더구나 과당경쟁으로 기술마저 흔들리고 있다.

한정된 기술인력을 잡으려고 여러 업체가 덤벼드는 바람에 기술력이 분산되고 인건비가 급등, IT업체들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김광현 기자 k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