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성서공단에서 섬유업체를 운영하는 김 사장.

그는 지난해말 대기업에 납품하고 받은 어음을 손에 쥐고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직원들의 월급과 자재 대금을 마련해야 했지만 그 어음을 할인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사채 시장을 헤맸다.

IMF체제 이후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대구 지역에 본사를 둔 대동은행과 경일종금 대구종금이 퇴출된데 이어 영남종금도 영업 정지를 당하고 하나로종금에 통합됐다.

조선생명과 삼성투자신탁증권은 대기업 소유로 바뀌면서 본사를 옮겼다.

이들 금융기관이 사라진 자리엔 일부 사이비 파이낸스 등 유사 금융기관들이 독버섯처럼 피어나 지역경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김 사장은 "대구 지역은 금융의 불모지가 됐다"며 "돈을 빌리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이기 때문에 사업을 줄이거나 아예 문을 닫는 업체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푸념했다.

이같은 금융경색 현상 때문에 지난해 대구지역 어음부도율은 0.36%로 치솟아 전국 3위를 기록했다.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빚어진 지역금융 공백현상의 단면이다.

IMF 구제금융 신청 전 2천77개에 달했던 전국 금융기관 수는 불과 3년새 1천5백98개로 4백79개나 줄었다.

은행 수는 33개에서 22개로 줄었다.

동남 동화 충청 경기 대동은행이 퇴출됐다.

합병을 통해 보람 장기신용 충북 강원은행 등도 간판을 내렸다.

IMF사태 이전 30개에 달했던 종합금융사는 현재 4개만 남아 있는 상태다.

보험사도 예외는 아니다.

태양 국제 BYC 고려 두원생보 등이 퇴출된데 이어 현대 삼신생명 등 4개 보험사가 금감위로부터 적기 시정조치를 받는 등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금고와 신용협동조합 수는 지난 97년 11월 각각 2백31개와 1천6백66개에서 지난해 말엔 1백46개와 1천3백16개로 감소했다.

이같은 금융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작용도 속출했다.

수많은 금융 맨들이 명예퇴직하거나 강제 퇴사를 당하며 거리로 내몰렸다.

외환위기 이후 행원 10명중 4명이 은행을 떠났다.

노사 문제가 극한으로 치달아 은행파업 사태가 이어졌다.

평생 직장의 개념이 사라지면서 금고 종금뿐 아니라 대형 시중은행에서도 금융 사고가 잇달아 터져 나와 고객들을 불안감에 휩싸이게 했다.

신용금고들이 줄줄이 퇴출당하자 일본계 고리대금업자들이 금고 인수에 눈독을 들이며 국내 금융업 진출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특히 금융시장의 자금난은 심각한 수위에 달했다.

지난해엔 주식 회사채 등 직접 금융시장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은행의 금융 기능이 마비되고 종금사도 해체 수순을 밟음에 따라 기업 자금시장이 극도로 꼬였다.

은행의 신용 문턱을 넘기 어려운 중소기업과 영세 상인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상호신용금고와 사채 시장도 지난해 말엔 예금인출 사태와 벤처 스캔들 이후 꽁꽁 얼어붙어 기업 자금줄은 완전히 말라버렸다.

중견기업 자금담당 임원인 이씨는 지난해말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에 진땀이 흐른다.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돈을 구하기 위해 은행 종금 신용금고 등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어 연말 만기가 되는 1백억원 규모의 회사채 차환(연장)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을 구하긴 커녕 여신 담당자를 만나기조차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십수년간 거래해온 금융기관들까지 나서 ''이번엔 갚으라''고 말할 때면 야속한 마음마저 치솟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은행들은 연말 결산을 앞두고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을 확보하기 위해 3조원이 넘는 기업 대출을 무차별적으로 회수, 기업 자금난을 부채질했다.

연말 자금난은 이제 연례행사가 됐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최근 금융경색은 짧은 기간에 모든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끝내겠다는 과욕의 산물"이라며 "정부가 지나친 조급증과 긴장을 풀어줘야 금융시장에 유연성이 생기고 경제 회복이 빨라진다"고 지적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