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곽모(41·고양시 일산구 백석동)씨는 이달초부터 대형 할인매장의 정육점으로 출근한다.

진열장에 쇠고기와 돼지고기 등을 정리하는 일이다.

''사모님'' 소리를 들어왔지만 은행원인 남편이 ''구조조정 대상''에 들어간 마당이어서 자존심은 팽개쳤다.

''일당 3만원''보다는 경험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옷에 피를 묻히고''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일감도 그렇게 험악한 것은 아니었다.

실직 남편을 둔 다른 친구들은 아파트 분양광고 전단을 나눠주는 일도 하고 있었다.

서울시취업센터는 요즘 구직 문의전화로 하루종일 북새통이다.

하지만 일거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

서울시가 지난달말 겨울방학 아르바이트 대학생 모집공고를 내자 무려 4천1백30명이 몰렸다.

2백50명 모집이니 무려 16.5대 1의 경쟁률이다.

지난해보다 2천명이상 더 몰렸다.

불황은 ''돈만 되면 뭐든지 해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눈높이''를 낮추어 할만한 일거리를 찾아나서는 것이야 말릴 까닭이 없지만 요즘은 ''생존 문제''가 가족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L백화점은 최근 매장별로 10여명씩의 주부 모니터 요원을 모집했다.

상반기에 10대 1 정도이던 경쟁률이 이번에는 30대 1을 넘어섰다.

활동비 명목으로 지급되는 30만원이라도 벌어보겠다는 주부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번역일을 하거나 동네 맞벌이부부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아줌마들도 많다.

대학 때의 전공을 살려 부업으로 초등학생 등을 상대로 과외수업을 하는 주부들도 적지 않다.

부모들로부터 용돈 받기가 여의치 않게 된 대학생들은 이것저것 가리지도 않는다.

텔레마케팅 전단배포 설문조사 등의 아르바이트는 ''고전적''인 일거리다.

일부 여대생이 단란주점이나 룸살롱에 나가 돈을 번다는 것은 더이상 화젯거리도 아니다.

인터넷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키도 크고 몸매도 좋으며 용감하다''며 ''어떤 일이든 시켜만 달라''는 요청이 수두룩하다.

상황이 절박해지면 ''탈법''도 불사한다.

소규모 사업체를 하다 부도를 낸 박모(41)씨는 노상강도를 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국회의원 보좌관까지 지냈던 이모(50)씨는 11일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초콜릿 3봉지와 액젓 1병을 훔치다 잡혔다.

이씨는 경찰에서 지난 98년까지 자신이 보좌관을 맡았던 국회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하자 D무역회사로 옮겼으나 부도가 나 노숙자 생활을 해왔다고 밝혔다.

남서울병원 신승철 원장은 "재산에 대한 집착이 상대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심한 경제적 추락을 겪으면서 심리불안 상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부(富)에 대한 도덕적 가이드라인과 새로운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유영석 기자 yoo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