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의 용역과제로 홍콩의 차이니즈대학교 래리 랭 교수와 레슬리 영 교수 등이 수행해 지난달 20일 발표한 "아시아 경제위기의 진상규명 보고서"가 아시아 경제에 대한 국제 금융계의 해석을 크게 바꿔 놓고 있다.

종래 아시아경제위기의 발생원인은 주로 단기 투기자본의 급격한 국제 이동 때문에 발생하는 일시적 유동성 부족사태로 설명됐다.

이같은 진단 아래 국제금융계는 단기자본의 급격한 이동을 감시하는 국제정보망을 구축한다든지,일시적 유동성 부족을 보완해 줄 국제통화기금(IMF)의 기능을 강화하고, 나아가 아시아통화기금(AMF)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대책을 제시해 왔다.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아시아기업들의 연줄사업 관행과 과잉.중복투자를 문제 삼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시장개방으로 경쟁수위를 높이고,합병이나 퇴출을 통해 과잉생산설비를 해소해야 한다는 방책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랭과 영의 새로운 진단이 나오면서 국제사회는 지금껏 취해 온 것과 매우 다른 시각으로 아시아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고,이를 계기로 변화되고 있는 서방 선진국들의 아시아에 대한 시각은 어떠한가.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랭과 영은 아시아경제위기의 최대 원인을 소액 주주를 착취하는 피라미드형 기업지배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즉 주로 한 가족이 소유한 사기업이 몇몇 상장기업 경영권을 장악한 후 이들로 하여금 또 다른 상장기업을 산하에 거느리게 함으로써 피라미드 구조를 이뤄,적은 자금만으로도 이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도록 체제를 갖춘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소액 주주들에겐 쥐꼬리만한 배당금만 나눠주고 모든 이윤을 내부거래를 통해 피라미드 최정상의 사기업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방계 상장기업들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각 상장기업들로 하여금 거액의 부채를 지게 한 뒤 이를 다시금 가족소유 사기업으로 빨아들여 이들에게 대출해 준 금융회사까지 착취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도산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소액주주와 예금주,그리고 금융회사를 살리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국민 일반에게 전가된다는 얘기다.

<>새 해석에 따른 처방 변화: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해석이 이렇게 달라짐에 따라 국제금융계의 처방도 달라지고 있다.

지난주 체코 프라하에서 열렸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합동 연차총회에서 종래 국제적자본 감시체계 구축을 강조하던 국제금융계 지도자들이 일제히 재벌구조 개혁을 강조한 것은 이같은 인식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부실화된 금융회사에 공적자금을 투입해 자본을 재충전한 아시아국가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던 금융전문가들이 이제는 "구조조정을 했다고 하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시큰둥한 태도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소수 경제 엘리트들이 다수의 기업과 심지어 금융회사들까지 장악하고 그들을 착취하는 기업지배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금융구조조정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 별로 노력하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국제지원을 중단하고 해당국 통화가치를 평가 절상토록 해 부실구조가 더 뚜렷이 드러나도록 압박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주 IMF의 최대 주주인 미국이 한국정부에게 58억달러의 대출금을 조기 상환하고 금리인상을 통해 원화가치의 절상을 유도하라고 요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현 구조조정 조치에 대한 서방의 평가: 이런 시각에서 현재 아시아국가들이 추진하고 있는 기업 및 금융 구조조정 조치들은 어떻게 평가될까.

일례로 일본이나 한국은 모두 부실화된 금융회사들을 4~5개의 초대형 금융지주회사로 묶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외국기업에 인수된 부실금융회사들이 부실채권을 매정하게 정리해 대형 기업부도사태가 연발하는 사례를 보고 기업 구조조정의 급격한 진전을 완화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서방 금융계는 아시아국가들이 은행의 부실상태를 최대한 숨기고 그 책임을 다수의 은행장에게 분산시켜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도록 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내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26일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스탠다드 앤 푸어스가 일본 미즈호 금융지주회사의 출범을 하루 앞두고 부정적 견해를 밝힌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일본의 현 금융 구조조정에 대해 서방 전문가들은 일본의 선단식 대기업 그룹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지니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신동욱 전문위원.경영博 shin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