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전략을 이렇게 짜기 힘든 때가 없었습니다"

삼성 계열사들의 내년 전략수립에 쓰일 "2001년 경영환경 변화와 대응전략"을 만들고 있는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의 최인철 연구위원은 밤샘작업을 하지만 기조를 잡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는 "올 상반기 경기가 정점일때는 악재가 생겨도 큰 충격을 받지 않았으나 하강기인 내년에는 약간의 충격파만 발생해도 연쇄적으로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면서 "절대수세경영"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값 하락과 유가인상, 금융불안, 임금부담 등으로 해서 기업들은 이구동성으로 "매출전망은 커녕 원가계산부터 나오지 않는다"면서 내년 전략 자체를 미루는 기업들도 많다.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소재한 현대자동차의 광화문 영업소.

자동차 영업소로는 전국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매장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매장 분위기가 썰렁했다.

차를 사기 위해 부지런히 영업소를 드나들던 인근 직장인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고 세일즈맨들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유상호 소장은 "유가인상에다 경기후퇴에 대한 우려감 등으로 고객들의 구매심리가 얼어붙고 있다"며 "이달 판매실적은 지난달보다 50% 줄어든 1백여대에 그칠 전망"이라고 말했다.

출시후 하루에 대여섯대씩 팔려나가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LPG차량 싼타페도 기세가 한풀 꺾였다고 설명했다.

LPG 가격이 추가로 인상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전략차종인 RV(레크리에이션 차량)가 직격탄을 맞았다고 그는 말했다.

며칠전 대한상의에서 4.4분기 자동차 내수전망을 전년동기 대비 7.2% 증가로 내놓은 것보다 영업현장 상황은 더 심각했다.

게다가 10월부터 상당수 차량 가격이 인상될 것으로 알려지자 자동차 세일즈맨들은 풀이 죽어 있다.

자동차 업계는 지난 98년 하반기부터 확장국면에 진입했던 내수경기가 이달을 고비로 꺾일 것으로 보고 있다.

대우증권의 장충린 연구위원은 "각 자동차 메이커들이 올해 목표치는 간신히 맞출 수 있을지 몰라도 내년도에는 상당히 고전할 것"이라며 "내수및 수출전략을 전면 재검토해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LG전자 고금석 판매기획팀장은 요즘 아침 회의전 전국에서 올라온 전날 1일 판매실적을 집계할 때마다 담배를 입에 문다.

그는 "TV 냉장고 세탁기 등의 판매량이 예년보다 10∼20% 줄고 있어 마케팅 전략을 어떻게 세울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다.

LG전자 제품을 파는 서울 사당동 하이프라자의 박상근 지점장은 "중대형 제품과 1백만원 이상의 고가품을 찾는 고객이 크게 감소했다"며 "혼수 가전제품 구매액도 1인당 3백만∼4백만원 선으로 작년보다 1백만원 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영업일선에서 경기가 급랭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서둘러 마케팅전략을 수정했다.

중산층 이하가 찾던 중대형 가전제품 생산량을 줄이는 대신 부유층이 찾는 대형 프로젝션TV와 디오스 냉장고 등에 대한 마케팅을 한층 강화했다.

한창 작업중인 내년도 사업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라는 긴급발송문을 전 부서에 돌렸다.

LG전자 오창덕 경영기획팀장은 "내년엔 유가인상, 환율, 금리 등 경영환경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 사업계획을 짜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고 밝혔다.

그나마 미국 경기가 연착륙돼 가전제품의 수출호황이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LG측은 설명했다.

4대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 그룹연수원에서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내년도 전략회의를 열었지만 ''어디서 수익을 낼 것인가''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각종 기관에서 발표하는 ''업종경기 양극화''란 자료에서 ''경기 맑음''으로 그려져 침체된 섬유 철강 정유 건설업종의 부러움을 샀던 컴퓨터 부분도 현장을 돌아보면 잔뜩 먹구름이 깔리고 있다.

삼성전자 리빙프라자 선릉점의 오종희 점장도 이달 들어 PC 판매량이 30∼50% 가량 감소했다고 말했다.

그는 점포위치가 벤처기업이 밀집한 테헤란로여서인지 코스닥 주가 움직임에 매출이 민감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방은 최악이다.

"최병하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이 경영하는 대하합섬이 법정관리를 신청할 정도이니 더 할말이 없습니다"

영남지역 경제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취재기자가 대구상공회의소에 묻자 최문식 사무국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대구경제를 떠받쳐온 섬유와 주택건설 양대축이 무너지면서 ''진짜 IMF가 왔다''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린다고 최 국장은 전했다.

정구학 기자 c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