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31일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19세였던 1934년 쌀가게 배달원으로 시작해 종업원 20만명에 매출액 1백조원의 현대그룹을 일구기까지 한국기업사의 찬란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의 역정에 마침표가 찍힌 것이다.

그는 도전적 예지와 강인한 추진력을 앞세워 지난 반세기동안 수많은 신화를 양산한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이다.

동시에 국가기간산업 발전을 이끈 경제인, 북방 외교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간외교관,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체육인이기도 하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정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 "큰 장사꾼"이 되겠다며 수없이 가출을 되풀이했던 "될성 부른 나무"였다.

47년 현대건설 창립을 필두로 시작된 그의 사업확장은 개발경제시대를 맞아 활짝 피어났으며 건설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반도체 등은 모두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뒤에도 금강산개발사업 소떼방북 서해공단사업 추진 등 굵직굵직한 민족현안사업을 직접 챙기면서 "도전과 개척"이라는 특유의 카리스마를 잃지 않았다.

60년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진출 등 한국경제의 한 획을 긋는 대형 공사를 수주하면서 정 명예회장의 탁월한 역량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68년 2월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정 명예회장의 해외 건설시장 진출도 숱한 화제를 낳았다.

65년 태국을 시작으로 베트남,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를 거쳐 70년대 후반 중동지역에서 대형 건설공사를 잇따라 수주하면서 현대건설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20세기 최대 역사(役事)의 하나로 꼽히는 76년 9억4천만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세계 건설업계를 놀라게 한 신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이어 정 명예회장이 일군 대표적 기업으로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있다.

25세때인 지난 40년 아도서비스 자동차수리공장 인수(금액 3천5백원)를 시작으로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그는 76년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를 생산해 내는데 성공했다.

이 여세를 몰아 캐나다 입성에 성공한 현대차는 수출 16개월만에 현지 수입차 판매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엑셀 시판에 들어가 엑셀신화를 엮어냈다.

이 과정에서 정명예회장은 특히 젊은 시절 미군관계공사에서 터득한 미국식 고객만족주의를 활용해 큰 호응을 얻었다.

9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중형승용차를 양산하면서 수출시장을 넓혀 나갔고 작년에는 기아자동차까지 인수, 세계 10대 메이커로 올라섰다.

현대중공업은 설립 자체가 신화였다.

정 명예회장은 57세때인 지난 72년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으로부터 조선소 건립자금 14억원을 수표로 받아내 국내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영국의 A&P 애풀도어사의 룸바통 회장은 "아직 선주도 나타나지 않고 한국의 상환능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자금지원이 곤란하다"고 버텼다.

이때 정 명예회장은 거북선이 그려진 5백원짜리 지폐를 책상에 내놓고 "우리는 벌써 4백년전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우리가 당신들보다 3백년이나 조선역사가 앞서 있단 말이오"라고 되받아 돈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77년 그는 마침내 한국경제의 총수자리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선출돼 "가출한 막노동꾼"에서 굴지의 재벌기업가로 올라섰다.

그는 이어 81년 특유의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유치권을 따냄으로써 전 국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물론 그에게도 크고 작은 시련들은 많았다.

지난 53년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과정에서 물가폭등으로 막대한 적자를 내면서 현대건설은 존폐의 기로에 섰었다.

당시 동생 정세영 현대산업개발회장의 집을 팔아 사업자금을 충당해야 했다.

60년에는 4.19로 들어선 장면 정부와 5.17로 집권한 군부정권으로부터 정경유착기업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강력한 규제를 받기도 했으며 92년 대선패배 이후에는 문민정부로부터 회사채발행 금지 등 전대미문의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처럼 고비때마다 위기를 정면돌파해 내는 괴력을 보여 주었다.

IMF체제하에서 강력한 구조조정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각 계열사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졌으며 98년에서 99년까지는 85세의 고령에도 직접 소떼를 끌고 방북하는 대역사를 연출했다.

입버릇처럼 말해 오던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어금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나의 생리"라는 얘기는 그의 지난 경영이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 명예회장이 마지막으로 사인한 "3부자 동반퇴진"은 그룹과 나라 경제를 염려한 고뇌의 결단이자 필사적 승부수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