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총리"를 자임하며 외환위기 극복과 구조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해온 박태준 총리가 취임 4개월여만에 중도하차했다.

지난 17일 행정법원으로부터 소득세 회피 등의 목적으로 부동산을 명의신탁했다는 판결을 받은데다 부동산 매입대금의 출처까지 의심받게 되자 더이상 총리직 수행이 어렵게 된 것이다.

박 전 총리는 취임당시만 해도 이전 총리들과 달리 실물경제통으로서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며 산적한 경제현안을 해결할 적임자로 기대를 한몸에 받았었다.

한국경제는 97년말 외환위기 이후 저금리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 지난해에는 사상 초유의 한자릿수 금리를 유지했다.

물가도 크게 안정됐으며 증시도 침체국면에서 벗어나 기업들이 자금난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경제성장률도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돌아서는 등 경기가 완전히 회복국면으로 돌아섰다.

해외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도 신뢰를 회복해 국책은행들의 신용등급도 "투자적격"으로 크게 상승했다.

따라서 올해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심화된 재정적자와 빈부격차문제, 실업문제 등 새롭게 대두된 경제문제들이 시급히 해결해야할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런 시점에 취임한 박 전 총리 스스로도 "디지털총리"가 되고 싶다고 밝혀 디지털경제의 견인차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그는 민주당과의 합당정신에 의거 자민련 몫으로 총리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취임이후 철저하게 정치색을 탈피, 경제문제 등 국정현안을 꼼꼼하게 챙겼다.

특히 "재벌들도 개혁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밝힌 취임일성은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에 대한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불거진 불명예스런 "과거"로 인해 중도하차하게 됐다.

가뜩이나 어려워진 최근의 경제상황에서 행정수반의 경질은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박 전 총리는 포철신화를 이루면서 오랫동안 경영을 해 실물경제에 해박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게다가 지도력까지 겸비하고 있어 박 전 총리는 정부의 재벌구조개혁의 적임자로 꼽혔었다.

올들어 무역수지 흑자폭이 급격히 축소되고 국제유가 상승 등으로 국제수지는 악화되고 있다.

금융.기업구조조정이 미진하다는 국내외 경고가 잇따르면서 주식시장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됐던 단기외채도 급증하는 추세여서 제2의 경제위기론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구조조정을 위한 추가공적자금 투입을 둘러싸고 정부와 정치권, 경제팀간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시점에 터져나온 "총리사퇴"는 우리 경제에 악재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나는 정치보다 행정이 체질에 맞다"고 강조해온 그가 경제개혁을 위해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여야 할 중차대한 시점에서 "증여세 회피" 등 반 개혁적 행위로 불명예 퇴진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김병일 기자 kbi@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