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기기 생산업체인 P사의 K사장.그는 실리콘밸리를 찾았다가 엄청난 낭패감을 느꼈다.

악몽에 시달릴 정도다.

K사장은 지난해 11월초 부푼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넜다.

동남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자사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찼었다.

내친 김에 외자도 유치,신규 사업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상상도 했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하는 순간,설레임은 금방 실망으로 바뀌었다.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별로 없었다.

외자유치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MP3의 시장성을 가늠하지 못하겠다는 것.일부 업체는 인터넷 사용이 초기 단계에 있는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쪽으로 수출선을 돌리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MP3에 관한 한 세계최고 수준의 제품 및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고 자부했던 K사장에겐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Y사의 L사장도 이와 비슷한 쓰라린 일을 경험했다.

Y사는 올초 컴퓨터 OS(운영체계)의 하나인 리눅스와 관련,새로운 개념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업체.L사장은 벤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마음으로 무작정 실리콘밸리를 찾았다.

하지만 쏟아진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비슷한 제품을 내놓고 있는 현지 업체가 수두룩한데 왜 미국까지 와서 난리를 치느냐는 것.L사장은 그날로 부랴부랴 귀국길에 올랐다.

실리콘 밸리에선 이같은 웃지 못할 해프닝이 흔히 일어난다.

현지에서는 한국 벤처기업들이 능력은 생각지 않고 의욕만 앞세우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를 연출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는 한편으로는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기업의 능력이라는 의미다.

어떤 신기술이 등장했고,또 기존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무한 경쟁체제에서는 기업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에 진출한 한국업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커뮤니티가 단절돼 있는데다 인력이 달려 정보 수집엔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신문을 스크랩해 돌아가는 사정을 추측할 뿐이다.

겨우 입으로 전해 들은 웹사이트를 찾아 한국 본사에 보낼 "동향 보고서"를 만든다.

어느 벤처기업의 실리콘 밸리 지사장인 D씨는 벤처산업 조류에 어두운 한국 벤처기업의 실상이 우려할 수준이라고 개탄한다.

"세계최초 개발이라는 수식어를 단 기술을 개발해 시장개척차 실리콘 밸리에 왔다는 기업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물론 미국 기업들은 관심을 두지 않아요. 조금만 지나면 대부분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갑니다. 벤처산업의 조류에 너무 어두워 이같은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어 한국 기업들의 신뢰도가 말이 아닙니다"

벤처의 본류와 뛰떨어져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벤처기업들은 대부분 인력과 자본이 달려 실리콘 밸리의 조류를 계속 체크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세계시장 개척,벤처대국 건설등은 요원할 뿐이다.

지난해 미국으로 건너와 인터넷 사업을 벌여 현지 벤처캐피털로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는 GBO의 추헌동 부장은 임시방편이나마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벤처기업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토대가 취약하고 정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정부도 나서야 합니다. 우선 KOTRA(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 조직을 첨단 산업지역에 재배치하고 적극적으로 벤처지원 업무를 하도록 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되겠지요. 세계적인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는 KOTRA가 영사관과 대사관이 가까운 지역이나 옛산업 중심지에 꼭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새너제이(미국)= 김태철 기자 synergy@k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