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공단의 한국열처리.

공장안을 들어서면 열기가 후끈 다가온다.

진공로 가스침탄로 고주파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들의 내부 온도는 최고 섭씨 1천4백도에 이른다.

이곳에서 담금질된 항공기 부품은 미국의 보잉 벨헬리콥터, 영국의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로 수출된다.

랜딩기어처럼 엄청난 하중을 지탱해야 하는 핵심부품은 열처리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그래야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자동차부품 공작기계 각종 금속부품도 마찬가지.

이희영(60) 한국열처리 사장은 고려대 법대를 나와 일본에서 직공 생활로
열처리 분야에 발을 들여놨다.

귀국해 창업한지 만 30년.

2명의 직원으로 시작해 이제 연간 70억원 매출에 종업원 80명을 둔 제법
탄탄한 중소기업을 일궈냈다.

전국열처리경진대회에서 3년 연속 대상을 받았다.

국내 업체로서는 유일하게 업계 최고 영예인 항공기부품 열처리인증을
세계 유수의 항공기업체들로부터 받았으니 어깨가 으쓱할 만도 하다.

그런데도 요즘 한숨을 자주 쉰다.

내가 왜 사업을 하나.

계속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종업원들에게 "한우물을 파면 언젠가 샘이 솟을 것"이라며 장인정신
을 가져줄 것을 당부해왔다.

열처리 없이는 어떤 산업도 할 수 없다는 자부심도 키워줬다.

일본은 열처리산업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외부인에게 다른 공장은 보여
줘도 열처리공장만은 공개하는 일이 없다는 설명도 곁들이면서.

하지만 환갑을 맞으면서 자신이 어리석은 게 아니었나 후회할 때가 많아
졌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는 까닭이 있다.

굴뚝산업을 경시하는 풍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인터넷이 아니면 별 볼일 없는 업종으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고생한 직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코스닥등록도 생각해봤지만 거들떠 보는
증권사가 없었다.

귓전을 울리는 소리는 "대장간 주제에..."였다.

벤처기업 임직원이 우리 사주나 스톡옵션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는 직원들을 보면 얼굴마저 들 수가 없다.

게다가 굴뚝산업에 대한 관청의 각종 단속은 왜 그리 심한지.

업계에서 설비를 가장 잘 갖춰 놨고 규정도 잘 지킨다고 자부하는데 단속에
끊임없이 걸린다.

누구든지 걸면 걸리게 돼 있는 규정 때문이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바에야 차라리 빨리
걷어치우는 게 나은 게 아닌가 자조하기도 한다.

국내 열처리업체는 5백여개.

이들 경영자 대다수가 비슷한 좌절감을 맛보고 있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도금 염색 주물 단조 볼트 너트 등 기반산업을 영위하는 경영자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기반산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몇년전 볼트 너트업체들은 포철이 원자재를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는데
항의해 공장을 일제히 세우겠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볼트 너트업체가 서면 한국의 산업은 모두 멈추게 된다.

음지에서 묵묵히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반산업, 나아가 굴뚝산업에 애정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아무리 정보통신이 발달해도 인터넷으로 담금질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 김낙훈 기자 nhk@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2000년 1월 2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