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 사태를 치뤄내고 있는 은행 사람들의 태도가 요즘 무척 달라진 것
같다.

은행원들을 만나보면 우선 대우사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
후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던 한 기업이 있다.

이 회사는 올해 경영목표에 미달하자 최근 채무재조정을 신청했다.

채권금융기관들은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부채를 깎아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회사의 워크아웃을 맡고있는 한 은행원은 아무 꺼리낌없이 "부채중
수천억원을 출자전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자연스럽게 수천억원이라는 숫자가 입에서 나왔다.

은행의 영업실적을 말할 때에도 은행원들은 무척 대범해졌다.

"수백억원, 수천억원 적자"를 당연하다는듯 이야기한다.

대형 시중은행들이 "조"단위의 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칭찬받을 만하다"는 말투까지 섞여있다.

적자가 한푼이라도 나면 어쩔줄 몰라했던 예전의 은행원들과는 천양지차다.

최근에 있었던 시중은행에 대한 금융감독원 감사에서도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을 보인 은행원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억원 정도의 부실대출을 갖고 뭘 그러느냐"는 항의섞인 눈빛으로 감사
관계자들을 쳐다보는 사례도 많았다는 것이다.

은행원들은 지난 97년말 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은행퇴출과 구조조정으로 수만명이 일자리를 떠났다.

살아남은 은행원들도 수십조원의 공적자금 투입과 기업연쇄부도, 최근의
대우사태등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사건들과 "조"단위의 돈이 신문지면에 연일 오르내리자
은행원들은 숫자감각을 잊어버린 것 같다.

은행원들이 대범해지는 것은 부실기업 입장에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다.

수천억원의 빚을 쉽게 주식으로 바꿔주는 은행보다 더 고마울게 없다.

그러나 이 돈은 잘못 쓰이면 국민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숫자감각을 잃어버린 것을 은행원들의 잘못으로 탓하기는 어렵다.

(주)대우 한 회사에 18조7천억원의 부채가 출자전환되는 사태를 겪으면서
국민 모두가 숫자에 무감각해졌다.

그래도 은행원들은 단돈 1원에 민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국민이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 경제부 현승윤 기자 hyunsy@ked.co.kr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