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대통령의 "부실기업 정리" 발언이 걷잡을 수 없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김대통령은 지난 10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이달말까지 도태시킬 기업과
살려야 할 기업을 구분해 선별 지원하겠으며 내달에는 은행에 대한 구분
작업도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재경부 금융감독위 당국자들이 수차례 한 얘기다.

특히 금감위는 지난달말 구조개혁기획단설치계획을 발표하면서 똑같은
내용의 일정을 제시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말씀"은 폭탄발언이라도 되는듯 나라안팎을 들끓게
하고 있다.

같은 말을 했던 금융감독위원회 이헌재위원장도 놀란 듯하다.

이 위원장은 파장이 좀처럼 가라앉을 조짐이 보이지 않자 연일 "쿨다운
(cool down)"을 외치고 있다.

재계 금융계 증시도 발칵 뒤집혔다.

살생부 명단이 나돌고 있다.

"내가 살려면 남이 먼저 가게 하라"는 생존논리가 판치고 있다.

다른 기업들에 대한 음해도 급격히 늘었다.

은행과 당국에 대한 로비도 잇따르고 있다.

금융권은 슬그머니 대출을 회수하고 있다.

이처럼 사태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극단적인 비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10일 국민과의 대화를 기점으로 나라가 다시 지난해 11~12월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5월위기설, 6월위기설이 유포되던 터다.

특히 일각에선 극적인 반전이 없으면 김대통령이 긴급명령을 발동해
비상조치를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걱정들이다.

이들은 김대통령이 지난해 대선과정에서 긴급명령을 발동해 증시붕락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과단성있는 정책을 당시 정부에 제의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부실판정을 해야 하는 은행들도 심리적 압박이 엄청나다며 "신관치"라고
못마땅해 한다.

미국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부실금융기관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었다.

과연 정부가 "준비된 금융당국이냐"는 의문이 제기되는건 당연한 일이다.

금융계 한 관계자는 "부실기업 판정을 하기도 전에 김대통령의 말씀으로
모든게 결판날 판"이라고 말했다.

국민들이 지나치게 대통령만 쳐다보는 구태에서 벗어날 때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대통령이 새로울 게 전혀 없는 발언을 했는데도 금방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법정관리상태인 나라를 다시 부도내는 자승자박
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계와 재계는 청와대 재경부 금감위가 선거를 앞두고 지나치게 정치적
효과만 노리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조용하면서도 과감한" 구조개혁을 주문
하고 있다.

< 허귀식 기자 window@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