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을 줬는데도 자꾸 와서 물어봅니다. 하루아침에 안되는 모양이예요"

금융감독위원회 윤원배 부위원장의 말이다.

은행들은 당국의 "자율" 약속을 믿지 않는다.

대통령이 "자율"을 말해도 그건 "정치적 수사"라고 생각한다.

속다르고 겉다른 일이 한 둘이 아닌데 괜히 믿고 일을 저질렀다 뒤탈이
날까 두렵다는 게 이들의 속마음이다.

이리 살피고 저리 살펴 "높은 분" 뜻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는걸 은행문을
들어선 직후부터 배워온 그들이다.

행장은 정부와 정치권 눈치를, 임원은 행장 의중을 살피고 헤아려야 한다.

일반 직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30여년을 길들여진 탓에 어느날 갑자기 주어진 "자율"은 짐일뿐이다.

최근 동아건설 지원문제를 다루는 은행들 모습에서도 변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채권은행들은 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얻어내려 여러곳에 의사타진을 했다.

청와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은행감독원 등 손이 닿을만한 곳은 다
접촉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채권단은 "당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답을 얻어냈을 뿐이다.

은행사람들 고민은 여기서 더 커졌다.

"알아서 하라는 말이 살리라는건지 부도내라는건지 해석이 안됩니다.
스스로 판단하기엔 너무 벅찹니다. 한번 1차부도를 내고 신호를 기다려
볼까요"

한마디로 은행들은 자신이 없었다.

은행들의 눈치보기는 협조융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임원선임 직원인사 해외차입 등 중요사안뿐아니라 소소한 내부행사까지
위쪽 "싸인"이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눈치보기 때문에 죽을고비를 넘긴 제일 서울은행조차 이런 이상한 체질을
바꾸진 못했다.

이제 당당히 정부의 "지시"를 따르게 됐으니 오히려 속이 편하다는 반응
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더욱이 이젠 정부은행인데 다시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게 이들 은행
상당수 사람들의 믿음이다.

자율체제보다 타율체제가 더 편하고 좋은 셈이다.

물론 은행들도 할말은 많다.

말이 자율이지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당국은 은행장 선임을 알아서 하라고 했다가 주총이 끝나기가 무섭게
잘못됐다며 흔들어댔다.

대출도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중소기업대출에 관한한
은행장의 일거수 일투족을 점검했다.

증시여건이 좋지 않다며 증자를 막았다가 지금은 최악의 증시상황에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낮으니 증자를 하라고 한다.

은행의 대형화를 외치면서도 무더기 설립을 허용했다.

정부가 이처럼 앞뒤 안맞는 일들을 많이 벌린 마당에 "자율"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게 은행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다.

어쨌든 은행들이 앞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해야 한다는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수십년 몸에 밴 체질을 얼마나 빨리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일뿐이다.

< 허귀식 기자 window@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5월 13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