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기업들은 앞다퉈 투자 예산을 줄이고 있다.

제조업의 경우는 지난해보다 42.3%나 축소했다.

기존 시설에서 만드는 것도 다 못파는 처지에서 새 설비를 들여놓을
이유가 없어서다.

운영자금이 모자라 하루 하루 버텨가기도 어려운 기업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개발(R&D)투자는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없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불요불급"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 불황기를 견뎌내기 위해 소극적인 전략을 택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당장 지금 신제품이 나오지 않아도 영업은 된다.

팔 물건도 많다.

게다가 경쟁사들도 신제품을 내놓지 않는다.

실제로 전경련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은 올 연구개발 투자비를 작년보다
20.8% 줄여 책정했다.

제조업체들의 경우는 21.1%를 축소했다.

문제는 연구개발투자가 없으면 경기가 회복될 때 승부를 걸 품목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수요가 크게 늘어도 내놓을 신제품이 적어질 것은 뻔하다.

수입품이 시장을 잠식하는 걸 눈뜨고 봐야하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기업들이 앞다퉈 R&D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한의 효용을 얻으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된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제품개발기간의 단축.

삼성전자는 최소 반년은 걸리던 가전 신제품 개발기간을 2개월로 줄였다.

가능하면 빨리 상품화해서 R&D 투자비를 현금화하겠다는 복안이다.

R&D투자비의 회전율을 높이는 방법이다.

코오롱도 5년 정도 걸려야 상품화할 수 있었던 기존 방식을 버렸다.

1년내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신제품"이라고 인정치 않기로 한 것이다.

자동차업계도 보통 36개월은 걸리던 신차 출시기간을 24~26개월로 줄이는
추세다.

대우자동차가 최근 내놓은 경차 마티즈는 26개월만에 시장에 나왔다.

판매 광고 생산기술 등 관련된 전부문이 초기부터 참여하는 동시공학과
설계.기획단계에서 협력업체와 함께 개발하는 게스트(guest)엔지니어링을
채용한 결과다.

한정된 재원을 특정부문에 집중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아토스를 중심으로 소형차 개발에 R&D를 집중하고 있다.

중형이상의 자동차 내수가 한정돼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LG화학은 투자규모를 줄이지 않는 대신 승부사업에 R&D예산을 집중
투입키로 했다.

정보소재와 생명공학이 LG의 승부사업이다.

아예 연구개발의 주체를 외부에 두는 방법도 나타나고 있다.

R&D의 아웃소싱이다.

삼성정밀화학은 외국의 벤처연구소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개발을 완료한 1등제품들을 잡아내기 위해서다.

덕분에 이 회사는 무혈혈당측정기 인슐린자동주입패치제 등 몇몇 제품의
경우는 "세계 최초 상품화"를 코앞에 두고 있다.

전산업의 구조조정과 함께 R&D투자에도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 권영설 기자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4월 2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