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나의 살아온
이야기"(솔출판사)를 펴낸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이은 두번째 회고록이다.

정명예회장은 첫번째 회고록과는 달리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는
과거 정권의 실정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소년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과 생각을 담담한 필치로
적어가던 정명예회장은 "책을 마치며"에서 경제위기의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한 뒤 역대정권의 "잘못"을 적시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비난이 신랄했다.

정명예회장은 "김영삼 정부는 "신한국"이니 "세계화"니 하며 빛좋은
개살구같은 허랑한 말로써 피땀 흘려 벌어들인 달러를 마구 낭비하게끔
부추겼고 더욱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달러를
빚으로 끌어다가 국민 경제를 망쳤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김영삼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군사정권 때보다 깊고 거세다"면서
"나는 이제 모든 미움을 거두고 오히려 "나라를 부도낸 정권"으로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저들에게 인간적인 측은한 마음을 갖는다"고 술회한 대목도
있다.

정회장이 김영삼 전대통령을 이처럼 강도높게 비난한 것은 지난 92년
대선출마이후 현대그룹에 몰아닥친 세무조사와 여신규제, 신규사업 불허
같은 각종 보복성 행위와도 적지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92년 대선에 출마한 것에 대해서는 "경제만 잘되고
있다면 누가 정치판에 끌어 들이려고 해도 끌려 들어갈 내가 아니었다.

가족들중 단 한사람도 내 뜻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우들은 실패했을 경우 현대가 감수해야 할 불이익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는 "옛날에 짚신 한켤레 신고 맨몸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인데,
우리가 망한다고 해도 구두는 신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우거지국 먹고 살 각오를 해둬라.

죽으면 맨몸으로 가는 게 인생인데 망한다고 해도 아까울 것 없다"고
그들을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역대 정권과 정치자금에 대한 비판도 감추지 않았다.

"기업을 하면서 수많은 정치 지도자, 정치인을 만났지만 존경할 만한
정치인다운 정치인을 만났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정치였기 때문에 외국언론으로부터
"포니 수준을 못 따라오는 한국의 정치 수준"이라는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권력은 무분별, 무경우, 무소신, 무경험, 몰염치,
무능력이 전부였다.

나라는 산으로 가든 말든, 강으로 가든 말든, 밤이나 낮이나 자기네들끼리
세력 다툼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걸핏하면 세무조사에, 걸핏하면 잡아넣고,
걸핏하면 협박에, 또한 꼬박꼬박 바쳐야 하는 정치자금에, 기업입장에서는
무섭기도 엄청나게 무서웠다.

6공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서는 더더구나 기업활동 하기가 힘들어졌다.

성금이라는 명목의 정치자금은 정권이 바뀔 수록 단위가 커져갔는데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뭉텅이로 돈을 바쳐야 했다.

6공에는 3백억원의 돈을 바치고도 90년도의 불공평한 세무조사이후 나는
정부와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정 명예회장은 회고록 말미에서
"5년전 내가 낙선한 것은 나의 실패가 아니라 YS를 선택했던 국민들의
실패이며, 나라를 이 지경으로 끌고온 YS의 실패이다.

나는 그저 선거에 나가 뽑히지 못했을 뿐이다.

후회는 없다"면서 "타고난 일꾼으로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오늘의 나일
뿐이며, 일꾼으로서 지금의 나는 아직 늙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고록은 정 명예회장이 구술한 내용을 받아 방송 작가 김수현씨가
집필한 것이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3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