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원죄이기도 했다.

OECD가입, 국민소득 1만달러 등에 대한 오도된 신화에 근거한 것이었다.

악성종양처럼 은밀히 자라왔던 문제 - 그것은 역시 원화의 값어치, 즉
환율이었다.

외환위기가 턱에까지 차올라 왔던 지난해 11월17일 오전 8시.

김석동 외화자금 과장이 강경식 부총리의 출근을 기다려 장관실로 들어섰다.

김과장은 이날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 터였다.

"장관님 더이상은 버티기 어려습니다. 실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1백60억달러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강부총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과장-. 그래. 이제 그만 팔아"

결사항전을 부르짓으며 무너지는 환율을 방어하기 시작한지 1개월여만의
항복선언이었다.

원-달러 환율은 이날 시장이 열리자마자 간단히 상한가를 기록한후 거래가
끊어졌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상한가를 기록한채 거래가
두절됐다.

외환시장은 차라리 적막강산이었다.

달러당 2천원대를 앞둔 폭풍전야였다.

강부총리는 이미 전날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IMF로 가겠다"며 캉드쉬
총재에게 고개를 숙인 터였다.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자력
으로 막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 교섭에 들어가더라도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외화자금과 관계자들은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재경원이 생기고 가장 바빴던 날이었다고 말해지는 11월9일(일요일)로
거슬러 가자.

재경원이 그랜드 디자인이라고 이름붙인 외환위기 대책이 만들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인터콘티넨탈호텔의 비즈네스센터 회의실에 둘러앉은 고위 인사는 모두
6명.

물론 금정실의 많은 실무자들이 회의실밖에서 자료를 챙기는 등 부지런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재경원이 만든 그랜드 디자인에 대한 리뷰가 있었다. 물론 환율 대책이
주된 논제가 됐다. 이경식 한은총재가 "이제 더이상은 불가능하다. 자유낙하
(free drop)를 허용하자"는 말을 꺼냈다. 완전한 자유변동 환율로 가자는
말이었다"(김인호 경제수석 증언)

이경식 총재의 이말로 논전의 막이 올랐다.

쌍방간에 경제운용에 대한 불만이 목에까지 차올라 왔던 데다 목전에 닥친
국가부도를 놓고 신경들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강부총리가 제동을 걸었다.

강부총리는 "좀더 지켜 보자. 한도 자체를 완전히 트기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 금융대책 결과를 보아가면서 추진하자"고 맞섰다.

윤진식 청와대 비서관이 어렵사리 침묵을 깼다.

윤 비서관은 이모임에서 말석이었다.

"대책을 발표하고 시장반응을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이상 환율을
방어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봅니다"

사실 윤비서관은 부총리와 논전을 벌일 입장은 아니었다.

논란끝에 결국 월, 화 이틀동안은 환율 방어선을 치지 말고 버텨 보자는
결론이 났다.

물론 월요일인 10일 환율은 순식간에 20원 이상 폭등해 9백99원으로
치달아 갔다.

홍수는 범람 일보직전으로 갔다.

"지켜 보자"는 재경원이었지만 달러당 1천원 붕괴는 무조건 막아야 했다.

김석동 과장은 전화통을 붙들고 고함을 질러댔다.

실무자들도 "달러 사자고 주문내는 곳이 있으면 기업이건 은행이건 죽여
버리겠다"는 험악한 말들을 전화통에 퍼부어댔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재경원이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달러당 1천원"은 이미 방어선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선이었다.

외환 딜러들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 이보다 10일 앞선 10월28일께부터 시장은 종을 친 상태였다. 딜러들
끼리 하는 말로 "무게를 단다"는 말이있다. 이날부터 무게추가 한쪽(사자
일변도)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결국 29일부터는 한은이 달러를 배급하는
사태가 왔다. 정부가 환율을 계속 방어하겠다고 한 것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외국계 M은행 딜러 C씨)

그러나 "막판까지 버티자"는 강박관념이 재경원을 지배했다.

"환율을 방어하자는 강부총리의 생각이 주전론이었다면 이총재의 견해는
주화론이었다. 나 자신은 주전론의 입장에 서 있었다"고 김석동 과장은
말했다.

옥쇄론이었다.

항복론대 옥쇄론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키로 한 다음날까지도 계속됐다.

이날의 토론은 사실 지난 96년 가을 이후 불꽃튀게 진행되어 왔던 "환율
논쟁"의 허무한 피날레에 해당되는 것일 뿐이었다.

논쟁은 이석채 경제수석 시절로 뿌리가 가닿아 있었다.

국제수지 적자가 이미 2백억달러를 넘어 있던 당시였다.

국제수지가 적자를 보이면 원화를 평가절하해야 한다는게 교과서였다.

그러나 정부의 대응은 달랐다.

"당시 정부는 또 다시 손쉬운 환율조작을 했다간 국가 경쟁력은 영원히
확보할수 없다고 판단했다. 환율을 손대는 대신 고심끝에 선택한 것이
노동시장 유연성과 경쟁력 10% 높이기 였다. 요소가격을 낮춰 환율상승
압력을 흡수한다는 전략이었다"(강만수 재경원차관 증언)

정부의 이 전략은 불행히도 현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노동법은 파동으로 갔고 경쟁력 정책도 기업들의 반대가 높아지면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환율 외에 정부가 선택할수 있었던 남은 방법이 바로
금융개혁이었던 것이다"(재경원 고위 관계자)

재경원내에서는 청와대가 주도한 이같은 전략을 두고 격론이 붙었다.

기획원 출신들과 재무부 출신들간에 알력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차에 강경식 부총리가 들어서면서 기획원 라인들이 힘을 받았다.

"기획원 출신들은 대부분 래디컬(급진개혁론자)이며 펀드맨탈리스트였다.
수습보다는 개혁을 통한 정면돌파를 추구했다. 여기에는 금융에 대한 무지,
그리고 위기에 대한 과소평가와 자신에 대한 과신이 깔려 있었다. 이것이
개혁도 놓치고 수습도 놓친 원인이라고 본다"고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소의
간부는 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보사건이 터졌다.

이제 환율 현실화외에 더는 방법이 없다고 재경원의 외환실무자들은 판단
했다.

다음은 김석동 외화자금과장의 증언.

"작년 1월21일 외화자금과를 맡았다. 이틀뒤 한보가 터졌다. 달러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원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키로 하고
한은과 협의를 거쳐 3월말까지의 절하목표치를 정했다"

정부의 이 결정에 따라 환율은 3월말까지 실제로 5.9%나 대폭 절하됐다.

그러나 김과장의 계속되는 설명은 뜻밖이었다.

"5.9%가 목표가 아니었다. 실제 목표치는 이보다 훨씬 높았다. 환율을
완전히 현실화해야 한다는 것이 실무선의 판단이었지만 추가절하가 시도
되기에는 이를 막는 여러가지 외부 요인이 많았다"

김과장은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외부 요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재경원의 다른 관계자들도 굳게
입을 닫고 있다.

청와대에서 국민소득 1만달러를 유지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일설도
있다.

그러나 이주장에 대해 최근 기자와 만난 김인호 경제수석은 "얼토당토 않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물가안정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얘기였다.

"정책 당국자들의 고집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들은 최후까지 금융개혁 등
구조개선을 통해 정면돌파한다는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지난 1년여동안
몇차례나 환율을 현실화하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정부는 고통감내를 통해
원절하 압력을 흡수한다는 전략을 끝까지 고집했다. 외환위기가 목에 까지
차올라 왔던 11월까지도 그랬다"고 앞서의 국책연구소 간부는 말했다.

1년여를 계속된 환율정책 오도의 결과가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말부터는 미국계 P사 등 합작사들이 이미 자본금을 달러로 전환
하기 시작했다.

강남의 일부 부유층들도 여러개의 계좌를 동원해 달러 사재기에 동참했다.

모두가 쉬쉬하며 아는 사람만 안다는 식으로 달러를 사들였다.

"10월중순 이후에는 아줌마부대들도 대거 환전을 시도했지만 은밀한 달러
사재기는 이보다 한달정도 일찍부터였다. 당시만해도 참 재빠른 사람들
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라가 거덜날 줄은 몰랐다"고 J은행 역삼
지점 관계자는 말했다.

달러가 1천6백원을 들락거리고 있는 요즘도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1달러를
8백원으로 암산하는 버릇이 남아 있다.

지난 수년동안 "1달러=8백원"의 단맛을 보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이 정부는 세계화 구호를 내걸고 국제협력기구(OECD)에 가입하는 등
국민들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어갔다.

그것은 기만이기도 했던 것이다.

(정규재 조일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