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영(77)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재계의 부도옹"으로 불린다.

유난히 많은 굴곡을 겪으면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신화를 남겨
왔기 때문이다.

그런 정 명예회장이 지금 40년 경영인생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한라그룹이 부도라는 자금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 것이다.

사실 정 명예회장의 경영인생은 역경의 연속이었다.

기업을 빼앗기고 병마에 쓰러져도 그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곤 했다.

특히 지난 89년 7월 뇌졸중으로 쓰러진뒤 수족이 불편한데도 휠체어에 몸을
의지, 최근까지 한해에 2백일이상 세계현장을 누빈 그의 현장경영정신에는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오뚝이 기업인, 휠체어 총수, 인간 기관차등 그의 별칭들이 이를 가감없이
말해주고 있다.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인 정 명예회장은 지난 51년 형의
권유로 현대에 들어가 현대건설의 전후복구사업 참여와 육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면서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런 그가 한라그룹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현대건설 사장으로 있던 지난
76년.

한라의 모태가 되는 현대양행(한국중공업 전신)과 함께 독립해 나온 것.

현대양행은 지난 62년 설립된 중전기기 업체로 76년 기공에 들어간
창원공장은 당시 중전기기관련 단일공장으로는 세계 최대규모였다.

그러나 80년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정 명예회장은 몰락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정부의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으로 창원공장을 다른데로 넘겨주게돼
모기업인 현대양행을 사실상 잃게된 것이다.

그것도 영어의 몸까지 되면서.

정 명예회장은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혼자의 힘으로 재기에 성공한다.

현대양행의 일개 부서에 불과했던 만도기계 한라해운 한라자원 등을 각각
주력기업으로 키워 내고 한라시멘트 한라중공업을 세우는 등 재계 15위안의
대기업으로 육성, 화려한 재기의 드라마를 보여줬다.

정 명예회장은 이같은 사업확장속에서도 오직 중공업분야를 고집했다.

그가 기계산업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72년 현대양행 경기도 군포공장에 종합기계공장을 건설한 그는 여기서
국내 처음으로 불도저 굴삭기 크레인 등 건설중장비를 생산했다.

77년에는 2억3천만달러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잔시멘트플랜트를 턴키로
수주, 플랜트수출 1호의 기록을 세웠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89년 경영인이 아닌 개인으로서 또다른 좌절에 빠지게
된다.

서울 대치동에 번듯한 사옥까지 지은 그해 7월21일 새벽 일본 재계인사를
만나러 가다 신라호텔에서 중풍으로 쓰러진 것.

치료차 미국으로 떠날때 70대의 기업인이 경영일선에 다시 복귀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도 1년의 절반이상을 해외에서 보내는 강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또 정치권을 멀리하는 기업인으로도 유명하다.

"노태우비자금" 소용돌이때 유수의 대기업중 한라만이 빠져 있었을 정도다.

정 명예회장은 경영인생에서 최대의 시련을 맞고 있다.

지난 35년간 일궈온 한라그룹이 해체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부도옹이라는 별명답게 그가 이 시련을 딛고 다시 한번 오뚝이처럼 일어
나는 신화를 보여 주길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 김철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