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은행들의 외화자금 사정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후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한국 금융기관 "얼굴마감" 격인 산업은행마저 요즘은 단기 크레딧 라인이
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돈을 빌려 주겠다는 곳은 없고 산업은행에 맡겼던 외화자금을 인출해 가는
투자자만 늘고 있는 지경이다.

산업은행 런던지점의 경우 자금부족현상을 막기 위해 엄청난 손해를 감수
하면서까지 보유중인 외국채권을 무더기로 내다 팔고 있다.

한 관계자의 말을 빌면 "1파운드만 막지 못해도 부도인데 지금 채권가격이
문제냐"는 것이다.

외화부족난은 이번 주가 지나면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 영국등 서방은행들은 이번주를 끝으로 대부분 결산작업을 벌인다.

올해 실적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구미 금융시장은 사실상 12월 둘째주
부터 "개점휴업" 상태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한국계 금융기관들로선 다음주부터 단기자금을 빌릴 데가 없어지는 셈이다.

돈 갚을 데는 많고 빌려주는 곳은 없고.

그 결과는 너무나 자명할 뿐이다.

한국이 이처럼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시장기대와 한국정부의 정책간에 엄청난 괴리가 있어서다.

우리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이후 이곳 금융기관(시장
참여자)들은 지원자금규모가 최저 5백억달러에서 최대 1천억달러는 돼야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논의되는 규모는 고작 2백억달러 정도였다.

시장기대는 여지없이 실망하는 분위기로 돌아섰고 그나마 단기자금을 빌려
주던 외국계은행들도 그 이후 크레딧 라인을 죄다 끊어버린 것이다.

서방 금융시장에선 요즘 재경원 정책을 빗대 "too late too little"이라는
말로 조롱하고 있다.

대책이 항상 늦고 처방책이라는 것도 매번 시장기대에 훨씬 못미친다는
의미다.

실제로 기아사태이후 재경원의 대책은 "실수연발"이었고 시장기대를 충족
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이번 IMF 협상결과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

안 봐도 결과가 뻔하다는 것이다.

한국계 금융기관들은 제발 이번(IMF협상)만은 시장기대를 만족시켜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이성구 < 런던 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