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분규를 계약불이행의 불가항력 사유로 명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파업으로 인한 납기지연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손해배상청구를
당하지 않습니다"

변호사와 고객간의 상담내용이 아니다.

기업법무실의 "패러리갈 (Para-Legal)"이 국제영업팀이 작성한
계약서초안을 검토하면서 발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장면이다.

패러리갈은 이처럼 소송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법률보조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각 기업의 법무실에는 변호사 1명당 2~3명의 패러리갈이 직원으로
근무한다.

대우그룹 국제법무실의 변호사 1명이 연간 30여건의 국제계약을 체결하는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것도 이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전문법률지식을 가진 패러리갈이 기업법무실에서 "실세"로 자리잡고 있는
증거다.

물론 상담료는 당연히 무료. 이들은 "사시패스"와는 거리가 멀다.

판사나 검사가 풍기는 권위나 보수적인 가치관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생생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한 법률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다.

두꺼운 법전을 암기하는 원시적인 방법으로는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통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정분야나 지역에 대한 전문성은 변호사를 능가하기도 한다.

일반회사법, 지적소유권, 국제거래법과 제2외국어는 기본.

미국의 반덤핑법과 EU통상법 등 국제거래비중이 높은 국가의 현지법은
물론 국제환경법 국제독점규제법도 줄줄 외울 수 있어야 한다.

여기다 투자가 급증하고 있는 중국 베트남 동유럽국가의 현지투자법도
기본도서목록에 추가됐다.

패러리갈이 정착된 미국의 경우 전문대학에서 기업법무 코스를 수료하고
로펌이나 기업, 정부투자기관 등지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로스쿨을 갓 졸업한 "병아리" 변호사들도 패러리갈과 함께 1년동안
실무훈련을 거쳐야 어엿한 변호사로 인정받을 정도다.

일본의 경우 전략법무실이라는 개념하에 변호사보다는 각 업종 및
지역별로 전문능력을 갖춘 패러리갈들이 모든 기업송사를 담당한다.

국내에도 국제거래와 회사법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학과가 대학에 잇따라
신설되고 있다.

광운대가 올해 국내 최초로 국제법무학과를 개설한데 이어 국민대도
98학년부터 기업법학과를 신설한다.

패러리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계약서의 단어 하나로 국내기업들이 클레임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

기업들이 국제 국내로펌등에 법률적인 자문을 구하고 있으나 비용이
많이 든다" (유선봉 광운대 국제법무학과 교수)

패러리갈은 국경없는 경제전쟁의 최일선에서 비용절감과 업무효율
증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사냥군의 역할을 수행한다.

"굳이 변호사 자격증을 따려고 고시촌에서 젊음을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습니다"

비사시 출신의 패러리갈은 기업법무의 문화를 바꿔나가는 법조계의 젊은
이방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이심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