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이 좁은 취업문.

끝없이 이어지는 명퇴바람.

이런 와중에 요즘 각 기업들은 밀려드는 인사 청탁에 몸살을 앓고 있다.

물론 예년 이맘때쯤에도 이런 현상이 없었던건 아니다.

그러나 올해의 청탁러시는 종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대학문을 빠져나오는 학생수는 크게 늘었지만 기업의 채용규모는 오히려
줄어든데다 명퇴자들까지 청탁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저마다 청탁배격을 위한 묘수찾기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대부분 기업들이 최근 입사원서를 마감하면서 청탁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기 시작했다.

인사부 직원들은 아예 전화수화기를 모두 내려놓는가 하면 다른 곳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정도다.

일부 기업에서는 최고경영자들이 꼭 필요한 일을 제외하고는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자제하고 있기도 하다.

얼굴을 맞댄 자리에서 들어온 인사청탁까지 물리치기란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어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각 그룹들은 총수들까지 직접 나서 부정 채용을
배격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등 대대적인 청탁배격운동을 벌이고 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우 사장단회의에서 "인사 청탁은 옥석을 가리지
못하게 하며 이는 결국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라"며
직접 인사청탁 근절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LG그룹은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룹 채용
운영위원회"를 구성하는등 이번 기회에 인사청탁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내기
위한 제도 마련에 착수했다.

현대 삼성 대우 등도 회장이나 각 계열사 사장 차원에서 인사청탁을
철저히 배격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채용과 관련된 청탁은 워낙 집요하다.

더욱이 요즘 대부분 기업들은 필기시험을 없애고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채용을 결정하는 추세여서 입사수험생을 가진 부모들은 "로비"가 당락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신앙"처럼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청탁이 받아들여 졌다해도 해당 수험생이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다.

쌍용그룹 관계자는 "1차 면접의 면접관을 실무직원들이 맡는 만큼 청탁
응시생들은 대부분 걸러지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실력이 없으면 2차 면접에도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중견기업들이다.

대기업들은 채용과정에 청탁을 배격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제도적인
장치를 두고 있지만 중견기업은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 중견기업 인사담당자는 "채용 청탁이 곳곳에서 밀려 들어와 청탁받은
응시생만도 채용정원의 2배나 된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취업문이 넓지 않은 여학생들이나 성적이 나쁜 학생들의 청탁이 집중적이란
점도 골칫거리다.

여성 지원자들에게는 적합지 않은 직종이 대부분인데다 성적불량자는
회사를 위해서라도 탈락시켜야 하는데 워낙 압력이 심하다는 하소연이다.

정부투자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성격상 고위공직자의 청탁이 특히 많이 몰리는 곳이 바로 정부투자기관
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탁인사는 결말이 안 좋다는게 대부분 인사담당자들의 판단이다.

한 기업 담당자는 "청탁에 힘을 입어 합격한 응시생의 경우 정상적인
입사자에 비해 애사심에서 크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업무능력도 뒤진다"며
"특히 청탁 입사자의 상당수가 조기 퇴직하는 경우가 많아 회사로선 큰
손해"라고 말했다.

어쨌든 취업결쟁에 못지않게 인사 청탁경쟁도 처절하리 만큼 치열한게
올해 취업풍속도의 한 단면이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