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이 마침내 "기아차"의 핸들을 놓고 도중하차했다.

전문경영인으로 80년대초 산업합리화 업체였던 기아그룹을 불과 10년만에
일약 재계 8위의 대기업 그룹으로 키워낸 그를 끝내 물러나게 한 것은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이었다.

"한국의 아이아코카" "자동차 경영의 귀재" "종업원 회사의 대표사원"
이라는 화려했던 영광의 타이틀도 이제 불명예퇴진과 더불어 세인들의
기억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한국 최고의 전문경영인"과 "경영부실에 의한 불명예 퇴진"이라는
상반된 표현에서 나타나듯 그에 대한 평가역시 크게 엇갈린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에 기여한 그의 공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만큼 그가 자동차산업에 남긴 족적은 크다.

58년 기아산업에 입사해 40년 가까이를 기아에만 몸을 담아온 그는 기아의
창업주인 김철호회장과 함께 지난 73년 한국 최초의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종합자동차 공장인 소하리 공장 건설을 주도하면서 한국 자동차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81년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가 내려지면서 기아의 사장을 맡은 그는
종업원들과 똘돌 뭉쳐 동아자동차와의 합병 위기를 넘겼으며 "봉고신화"로
기아의 골격을 세웠다.

미국 포드와 일본 마쓰다와의 3각 협력체제를 구축해 프라이드로 승용차
사업 재진출에 성공하고 아산만공장을 완공해 기아그룹의 1백만대 체제를
갖춘 것도 그가 아니었다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다.

지난 90년엔 전문경영인으로 기아그룹 회장에 취임해 한국 경영사에
새로운 장을 연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말 이후 무리한 사업 확장과 신규 투자가 그의 영광을
치욕으로 돌려놓는 분수령이 됐다.

인수한 기아특수강(대한중기)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자체 공장건설만을
맡던 종업원 출자회사인 (주)기산을 종합건설업체로 확대시키는등
호송선단식의 경영을 펼친 것이 기아그룹의 경쟁력 자체를 약화시켰다는게
재계의 중론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두 업체에 대한 과잉투자와 누적된 적자가 그룹을 법정관리의
위기로 몰아넣은 결정적인 요인이 돼버렸다.

게다가 협력업체와 노조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잘못이 있다는
소문이 유포되면서 김회장의 경영방식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그에겐 치명타였다.

결국 김회장은 기아그룹이 부실화된 데 책임을 지고 16년간 지켜오던
최고경영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의 손으로 넘어간 셈이다.

< 김정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