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본재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로 흔히 거론되는게 시장규모가
작기 때문이란 것이다.

공들여 신제품이나 신기술을 개발해 봤자 수요가 부족해 투자비
회수조차 어렵다는 얘기다.

자연히 기업들은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외면하게 되고 외국기업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OEM(주문자상표부착 생산방식)으로나마 납품하는 것에
만족하게 됐다는게 그럴듯한 부연설명으로 뒤따른다.

이대로라면 국내산업은 "수요부족 <>독자기술 개발부진 <>외산기계
수입급증 <>생산기반 붕괴"라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국내 자본재산업은 과연 구조적으로 발전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제는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시장수요를 탓하기 앞서 내놓을 기술과 제품이 없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지만 지금은 <>국내업계의 기술력이 선진국 수준으로 근접하고 <>정부의
지속적인 수요기반 확대정책이 시행되고 있어 더이상 "판로가 없다"는
소리가 부끄럽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국산기계는 무조건 질이 떨어진다"는 수요자측의
잘못된 인식을 고치는게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대구의 중소 섬유기계 생산업체인 D기계.이회사는 90년대 초반 대규모
기술개발과 설비투자를 했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이회사가 개발한 제품은 연사기.

가느다란 7-8가닥의 실을 꼬아 섬유을 짤 수 있는 굵은 실로 만들어내는
기계로 당시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산이나 이태리산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제품이었다.

93년 한중수교로 국내 업계의 중국진출이 활발해지고 때마침 중국도
경공업 육성정책을 펼칠 때라서 수요는 충분해 보였다.

정부도 개발자금으로 10여억원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공장이 신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제품을 사가는 기업이 있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동안 국내 공장에서 사용하던 일본산 중고기계를
뜯어다 해외로 이전했던 것이다.

K사장은 그동안 거래했던 기업들을 찾아가 "가격이 싸고 신제품인 만큼
일산 중고기계보다 높은 생산성을 올릴 수 있는데 왜 구입을 안해주느냐"고
호소했지만 반응은 차가왔다.

"성능도 검증안된 국산품은 쓸 수가 없다"는 답변만 들은 것이다.

하지만 K사장도 할 말은 있었다.

"일본산은 처음부터 세계 제일이었습니까.

첨단 기계도 아니고 이러한 범용기계마저 국내업체가 사주지않으면 우리는
언제 일등제품을 만들어봅니까".

D기계는 이때의 후유증으로 제품개발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자본재산업은 주로 중소기업이 공급자, 소비제품을 만들어내는 대기업은
수요자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기술개발이나 판로확대에 적극
나서주지 않는다면 발전하기 힘든 셈이다.

국산기계에 대한 불신은 대기업 사이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임창렬 통상산업부 장관이 최근 "지난 93년부터 96년까지 해외플랜트
수주는 4.5배가 증가한 반면 동반진출돼야할 일반기계의 수출이 1.7배 밖에
늘어나지 않은 것은 국산기계에 대한 불신풍조가 심한 것 아니냐"며
"경쟁사가 만드는 국산자본재를 사주지않고 외제를 선호하는 기업풍토를
고치지않는 한 무역적자는 줄일 수 없다"고 꼬집은 것도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국내 자본재산업의 취약함에는 정부의 잘못된 성장정책도
큰 작용을 했다는게 업계의 중론이다.

기계설비를 구입할 때 기업이 지원받는 정부자금에서부터 국산제품이
외산에 비해 홀대를 받는다.

국산기계에 대한 자금지원규모는 외산의 70%에 그칠 뿐더러 금리도
0.5% 정도 높은게 현실이다.

경제성장시대에는 우선 외국에 내다팔 소비재 생산이 급하다보니 생산성이
높은 외산기계 구입을 장려했고 이과정에서 국내 자본재산업이 "서자"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통상산업부가 <>국산기계 구입을 위한 수요자금융 지원규모 확대
<>설비구입을 위한 외화증권 및 상업차관 도입 허용 <>기계설비 및
플랜트류 수출지원을 위한 연불수출자금 규모 확대와 국산품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활동에 나선 것도 이러한 왜곡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다.

수요기반이 확대되지 못하는 이유는 수요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산업체들도 자사가 만들어낸 제품에 대해 자긍심을 못갖고 적극적인
홍보나 판로개척을 등한히 하는게 비일비재하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김재복 기아중공업 사장은 해외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반드시 그지역
기계전문지 기자들과 식사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고 있다.

"내가 내 제품을 선전하지 않으면 누가 저절로 찾아와서 사주느냐"는게
김사장의 설명이다.

최고경영자가 홍보에 적극 나선 결과 이제는 전시회마다 기자들이 먼저
"기아중공업 부쓰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온다는게 회사 관계자의 귀띔이다.

국내 자본재산업이 발전하는 열쇠는 무엇보다도 "기술개발"이 우선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최고의 제품을 얻으려면 먼저 생산업체가 기술개발에 전념할
수 있는 토양(수요기반)이 조성돼야하고 이것이 상승작용을 일으킬 때
2조달러에 달하는 세계시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국산설비에 대한 인식전환이란게 업계의 결론이다.

"소비재산업과 자본재산업이 불균형적으로 발달하다보면 경제구조가
위태로와집니다.

현재 세계 반도체시장을 한국과 일본이 석권하고 있지만 한국은 연간
30억달러의 수입장비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자마자 한국은 국가경제가 흔들리고 있지만 일본은
설비수출로 이를 만회하는데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자본재 육성을 외면하다보면 언젠가는 반도체도 섬유산업처럼 사양화되고
말겠지요"

업계 관계자의 걱정섞인 푸념이다.

<이영훈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