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삭공구 전문업체인 양지원공구의 송호근 사장.

그는 지난 81년 양지원공구를 설립, 10여년만에 이 회사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회사로 키워냈다.

양지원공구의 주력품목은 엔드 밀(End mill)로 자동차 항공기 금형 등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소모성 절삭공구이다.

이 회사는 "YG-1" 브랜드로 지난 한햇동안 약 2천3백만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전체 매출(약 3백억원)의 절반이상을 수출로 올린 것이다.

양지원공구가 지난 96년 영국의 북아일랜드에 현지공장을 짓기 시작하자
EU(유럽연합)본부에는 독일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 공구조합들의 항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EU본부가 양지원공구에 공장지을 자금을 지원한 것을 이들 조합이 따지고
든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이미 자신들을 압도하기 시작한 양지원공구가 바로 턱밑에
생산거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니 겁이 난 것이다.

이는 양지원공구가 품질과 가격 등 모든 면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춰
선진국 업체들에도 두려운 존재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송사장이 절삭공구 업계의 강자가 된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창업당시 국내 절삭공구 산업은 매후 낙후돼 있었고 수요 대부분을
수입품에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수출은 더구나 꿈도 못 꾸던 때였다.

그러나 송사장은 미국의 공구메이커들이 높은 노무비와 생산성 저하로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을 간파했다.

품질만 된다면 해외시장 공략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창업 초기부터 해외시장 개척을 시도했다.

창업한지 1년이 조금 못돼 미국으로부터 처음 주문을 받았다.

12명 직원들이 밤잠을 잊고 매달려 주문량의 일부인 3만달러어치를
부산항에서 통관까지 마쳤을 때였다.

그중 일부가 불량품임을 검사과정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는 눈앞이 아찔해지며 별 생각이 다들었다고 돌이킨다.

그래도 용기를 내 전부 다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부산에 급히 연락해 간신히 선적물량을 전부 회수하고 다시 만들어 보냈다.

창업 초기에 3만달러어치나 되는 제품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자금상으로도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계기가 돼 더욱 품질개발에 힘쓰게 됐고 신뢰도 얻었다.

국내외에서 조금씩 품질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지난 83년 2억원에 불과하던 매출액이 89년 1백억원을 훌쩍 뛰어넘었고
그후에도 매년 30%정도씩 증가했다.

그는 설비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매년 수십억원을 설비투자비로 들이고 있다.

이 때문에 자본금은 35억원에 불과한 회사이지만 공장마다 1백억원어치를
훨씬 넘는 공작기계를 갖고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절삭공구시장을 석권하겠다는게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양지원공구 사장실에는 소파 등 응접세트가 없다.

책상 하나에 의자 몇개가 고작이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그의 경영태도를 짐작케 한다.

그는 임원도 거의 두지 않고 있다.

임원은 해외 현지법인을 책임지고 있는 두 사람 뿐이다.

조직내 수직관계가 복잡해지면 직책위주의 경영이 이뤄지기 십상이고
이는 인력 낭비와 효율성 저하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직원들에게 책임감을 심어줘 제품과 경영에 대한 판단및 결정을
하부조직에서 직접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에만도 인천시 부평과 안산 시화공단, 광주 하남공단 등에 4개 공장이
가동중이지만 송사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거점의 세계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지난 92년 5월에는 미국 아칸소주에 현지공장을 준공했고 지난해
10월에는 영국 현지법인을 가동시켰다.

지금은 독일의 한 절삭공구업체 인수를 추진중이다.

< 김용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