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도안의 소재는 그 나라의 얼굴 구실을 한다.

특히 인물상의 경우에는 한 나라의 대표인물이라는 의미 외에도 그 나라의
발전성과 문화 등을 반영한다.

예를들어 우리나라의 5천원권 지폐에 실려있는 율곡 이이의 상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난 72년 최초로 발행된 5천원권에 들어있는 율곡의 초상은 석고처럼
차가운 이미지에 콧날이 오똑하게 솟아있어 우리나라사람이 아닌 서양인의
얼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은행권 제작기술이 부족해 종판을 영국의 지폐 제조회사에
의뢰한데서 비롯됐다.

당시 영국의 지폐 종판조각사는 우리나라에서 보낸 초상화의 스케치물과
조각상을 근거로 나름대로 정밀하게 도안을 제작했지만 서양인의 시각으로
율곡 초상의 이목구비를 표현하다보니 서양적 이미지의 인물이 탄생하게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이에 대한 시비가 일자 한국은행은 지난 77년 우리나라 조각사가
만든 종판으로 5천원권을 새로 발행하게 됐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해온 우리나라 화폐도안의 역사는 근대적
화폐가 발행된 금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9년 구한국은행이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으로 설립되면서 근대화폐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구한국은행권은 1910년에 발행된 1환권과 1911년에 발행된 5환권및 10환권
등 모두 3가지가 있다.

1환권에는 수원시에 있는 화홍문, 5환권에는 광화문, 10환권에는 창덕궁내에
있는 누각인 주합루를 앞면 주소재로 사용했으며 뒷면은 모두 액면표시와
문양을 채워졌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구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변경됐다.

1914년 조선은행권으로 최초 발행된 1백원권에는 대흑천상이 앞면의
주소재로 그려져 있다.

대흑천상은 불교에서 삼보(불.법.승)를 수호하여 먹을 것을 넉넉하게 하는
신을 의미한다.

이외에 조선은행이 발행한 지폐는 대부분 수노인상을 앞면의 주소재로
채택하고 있다.

어질고 장수한 사람을 지칭하는 수노인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일부에서 수노인을 구한말의 김윤식으로 보는 것은 그의 초상이 수노인상의
모델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또 뒷면에는 액면표시및 문양외에 간혹 조선은행건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구한국은행권은 일본 제일은행권 원판을 일부 수정한 것이며
조선은행권도 일본침략기에 발행된 것이므로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화폐로는
볼수 없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현대적인 형태의 화폐를 발행한 것은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된 이후이다.

결국 우리나라 화폐도안의 역사는 50년이 못되는 셈이다.

한국은행이 설립된 후에도 도안소재는 외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폐의 경우 앞면에는 주로 인물상, 뒷면에는 문화유적 역사유물 자연경관
등이 사용됐으며 주화의 경우 앞면에는 인물상 꽃 문화유적 등을 실었으나
뒷면에는 액면만 표시한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 화폐도안의 소재로 사용된 인물은 이승만 대통령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이황 이이 등이며 불특정인물로는 모자상이 있다.

여운선 < 한국은행 발권부장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