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잇달아 부도를 내고 금융시장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데는 기업경영이나 금융제도의 문제외에도 정부의 경직된 대응이 큰
원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위기론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원은 없으며 은행과 기업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언급,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국내외 금융시장의 동요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24일 금융업계와 경제계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4월 진로그룹에 대한
부도유예협약 적용 이후 거의 매월 1개 그룹씩 부도협약 대상 기업으로
지정되는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발언만 쏟아놓고 있다.

경영이 극도로 악화된 제일은행에 대한 한은특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잘라말했으며 기아그룹에 대한 지원은 국제기준에 어긋나 가능하지 않다고
분명히 했다.

이날 제주도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통상산업부는 기업의 구조조정은
자발적으로 해야 하며 산업합리화 등으로 지원할 수 없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 23일 강경식 부총리는 청와대 보고를 마친 다음 기업과 은행에
정부가 나서서 지원할 의사가 없으며 오히려 관련은행과 기업이 자구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개별기업 문제엔 관여하지 않는다는 점도 재차 확인했다.

당국자들의 이같은 발언은 원칙론으로서 별 파장을 일으킬 것 같지 않지만
곧바로 우리은행들의 해외신인도에 충격을 주어 이미 스탠더드 앤 푸어스사가
국내 5개은행의 신용등급을 요주의 대상에 올린데 이어 무디스사 역시 이날
3개 국책은행에 대한 신용등급을 네거티브로 변경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신규기업어음 할인을 사실상 중단하고 있는 것도
불안심리가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재경원 고위관계자들은 더군다나 이번 사태가 고질적인 차입경영을
교정하는 절호의 기회라는 입장을 거듭 강조, 발등에 떨어진 당장의 위기
관리 대책과 장기적인 정책 방향을 혼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경제계는
지적하고 있다.

경제계 일각에서는 상황이 악화되면서 대책을 내놓으라고 하는 경제계의
요구를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차제에 기강을 잡을 기회로까지 인식하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경제계는 정부가 시장경제의 원칙상 개입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는 위기의 책임을 모면하려는 태도로 볼수밖에 없다며 이미
발표한 정책방향의 수정을 포함해 시장상황과 분위기를 호전시킬 수 있는
대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