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야 어떻게 정부를 믿겠나"

재계 사람들의 입은 요즘 많이 나와있다.

정부가 호황기에 내놓아도 될까 말까한 정책들을 잇달아 내놓는가 하면
정작 역할을 해줘야 할 때는 책임회피로 일관하고 있다는 불만 때문이다.

이들에겐 수출입국을 선도해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당시의 정부에 대한
신뢰는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대신 리더십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정부에 대한 불신감만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를 위한 국가경쟁력 강화,경쟁력 10% 이상 높이기운동 등 시끌벅적
하게 추진하던 정책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고 A그룹의 한 임원은 말한다.

어쩌다 내놓은 정책들이 이처럼 하나같이 즉흥적이고 인기영합적이었으니
경제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부담만 지워왔다는 질책이다.

재계의 이같은 정부 불신기류는 특히 올들어 한보 삼미 진로 대농 삼립식품
기아그룹 등의 부도 내지 경영위기가 계속되면서 차츰 고조되고 있다.

"경제비상사태"로 표현될 위기가 이어지고 있는데도 모든 책임을 지기는
커녕 기업과 금융기관에 떠넘기는 정부가 내놓는 정책이라면 이제 믿지도
못하겠고 따를 수도 없다는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가 못믿는 건 정책 당국의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면 "시장경제원리"를 들먹이며 꼬리를 빼는 정부의 태도에
강한 불신을 갖고 있다.

지금의 경제비상사태가 정부를 포함한 경제주체들의 공동책임인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도 절대로 시인않으려고만 하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용환이사는 "금융을 정부가 틀어잡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일어난 것"이라며 "대출을 해간 기업과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의 탓으로만 돌리는 풍토아래선 유동성부족으로 인한 부도사태는
더욱 확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몰린 금융기관이 몸을 바싹 낮추면서 신용공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1,2금융권이 앞다퉈 대출금을 조기 회수하고 부채과다 기업엔 신규대출을
해주지 않으니 시중엔 돈이 남아돌지만 흑자부도의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정부가 손만 빼고 있으면 다행이다.

재계가 더욱 불만인 것은 정부가 돕기는 커녕 당장 필요하지도 않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제정책을 양산하고 있다는데 있다.

과다부채에 대한 이자는 손금처리를 해주지 않겠다는 기업재무구조개선책
이나 기조실 등을 없애고 오너에게도 계열사의 경영책임을 묻겠다고 하는
기업소유구조개선책 등 신대기업정책이 과연 그렇게도 급한 정책이냐는
비난인 것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지금 우리의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금융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이 금융권에 대한 지원의지를 적극적으로
밝힘으로써 돈이 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 김중웅원장은 "신용공황과 그에 따른 경제공황이 우려
되는 위기상황인 만큼 정부가 경제추스리기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 줘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혼자 살아남기 위해 대출금을 회수하는 금융기관
때문에 흑자부도가 속출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