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업의 잘못으로만 돌리려 하고 있다"

재계엔 요즘 "한보 사태 책임 전가론"이 나돌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가 한보그룹 부도로 촉발된 국민의 질타를 피해다니다 못해
그 화살을 기업으로 돌리고 있다는 게 그 골자다.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이라는 초강수로도 안되고, 금융개혁을 통한
돌파도 어려워지자 기업을 새로운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달 이후 갑자기 신대기업정책들이 잇달아 쏟아져 나오면서 한보
책임전가론은 더욱 설득력이 얻어가고 있다.

사실 "대기업 길들이기"는 주기적으로 반복돼온 것이니 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정책들은 "기업의 실패"를 눈에 띄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큰 일을 낼 집단으로 기업을 몰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경제연구원 김세진 연구위원은 "요즘 들어 예전엔 구하기 어려웠던
대기업그룹의 부채 관련 세부 통계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말로 정부의
기업재무구조 개선책이 갖고 있는 의도에 곱잖은 눈길을 보냈다.

비현실적인 정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도 책임전가론이 빠른
속도로 퍼져가고 있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자본금의 5배가 넘는 부채에 대한 이자는 손비처리를 안해준다는
방안을 KDI(한국개발연구원)가 만든 이유는 조세연구원이 정부의 협조요청에
난색을 표명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재계엔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결합재무재표 의무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재정경제운 내부에서도 결합재무제표를 작성하면 국내 30대그룹의 이익
등이 줄어 대내외 신인도가 크게 떨어질 것으로 우려하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

작성하는데만도 최소 5~6개월 길게는 1년이 넘게 걸려 금융기관이 이를
참조하기가 어렵다는 점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전문가나 실무자가 반대하는 비현실적인 정책을 굳이 밀어붙이는 이유가
석연찮다.

책임전가론의 보다 직접적인 바탕은 정부의 잇단 대기업정책이 대통령담화
이후 "급조"됐다는 데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지난 5월30일 대선자금과 관련한 담화를 통해 불법자금의
지하거래를 막기위해 지나친 차입경영을 제한하겠다고 밝힌 이후에
정부부처가 서둘러 마련한게 바로 이 신대기업정책들이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그렇게 강조하던 경쟁력 10% 더 높이기
운동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묻고 싶다"며 정부의 행적만능주의를 꼬집었다.

이와관련 서울대 경제학과 송병락 교수는 "정부가 사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재무구조 개선과 관련해 각종 정책을 선진국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하고 있지만 "선진국과 달리 금융자율화가 돼있지 않은
상황에서 정책의 실패만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정부정책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취지가 투명해야 공감을 얻는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가 못하다는게 중론이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