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독립 운동"을 관전하기에는 다소의 인내심이 필요한 것 같다.

어떡하다 한은이 이지경까지 왔나 하는 딱한 심정도 지울 수 없다.

재경원은 그동안 어떤 악행들을 저질러 왔길래 금융에 관한한 만악의
근원으로까지 치부되고 있는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남대문 출장소라고까지 폄하되던 한은이었으니 독립운동의 전말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재경원 나으리들이 수시로 한은돈으로 과외 지출을 결제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얘기이고 보면 저간의 사정도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요즘 한은의 돌아가는 모양새를 마냥 두둔할 수도 없다.

한은이 벌이는 운동치고는 품위가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투쟁은 금도를 넘어서고 있다.

한은 임직원들이 자신들의 수장인 총재를 트로이목마 운운하며 조롱하는
장면은 누가 보아도 그리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다.

한은 총재 자리는 직원들의 인기투표로 결정되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서명운동도 마찬가지다.

한은이 정부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론의 압력, 정치의
범람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런터에 스스로가 여론의 압력을 전선에 끌어들이고 있다면 한은은
나중에 "돈을 풀어라"는 대중의 요구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금통위의 기능이나 통화신용 정책같은 문제들은 전문가들이 책상에 앉아
치밀한 논리싸움을 통해 결정해야 하는 문제일뿐 결코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엇갈리는 마당에 거리의 사람들이 무얼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어느 나라를 가나 중앙은행 건물은 장중하고도 차거운 화강암으로 지어져
일반인의 범접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한은은 시정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산정으로 끌어올려
권위를 드러내는 그런 존재다.

대형 깃발이 펄럭이고 구호가 난무하는 한은을 보아야 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정규재 < 경제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