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커넥션"에 휘말려 어수선했던 현대 삼성 LG등 대기업그룹들은
외견상 다시 "평상 체제"로 돌아갔다.

총수들의 검찰 출두라는 "통과의례"가 정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데 대해
안도하는 분위기도 역력하다.

의례적으로 건네졌던 "성금"이외에는 별달리 추궁을 당한게 없어 사법처리
는 비껴가지 않겠느냐는게 이들 그룹의 반응이다.

이런 분위기는 노전대통령 비자금계좌의 실명전환에 참여하는등 "연루
혐의"가 짙은 일부 그룹들을 빼고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태풍 뒤끝"의 재계 표정은 "회색"이다.

허탈감과 함께 깊은 속앓이에 빠져 있다.

속앓이는 총수들이 검찰에 직접 출두하며 수사를 받아야 했다는데서 오는
"충격"에 기인한다.

수사 결과에 관계없이 총수의 출두 그 자체만으로 해당 그룹들은 상당한
"상처"를 받게 됐다는 표정이다.

A그룹 비서실 관계자는 이번 총수의 검찰 출두로 일단 노전대통령 비자금
건에 대한 "면죄부"는 받게 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면죄부를 받더라도 그 "비용"이 너무 크다"는 말도 했다.

그가 말하는 "비용"이란 그룹의 "얼굴"이 나라를 뒤흔든 사건으로 검찰에
출두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비리 연루자"로 비춰지게 된 것을 뜻한다.

B그룹 관계자는 "사법처리 여부와 관계없이 대부분 기업들은 이번 수사에
의해 대외신용 실추라는 단죄를 받은 셈"이라고 하소연했다.

이런 재계의 "여론"은 C그룹측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비록 참고인 자격이라고는 하지만 떳떳하지 못한 이유로 검찰에 불려다닌
총수들이 앞으로 외국 관리들이나 거래선을 만나 어떻게 비즈니스를 풀어갈
수 있을는지 한숨이 앞선다"(기획담당 임원).

이런 걱정은 그룹 경영에서 해외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10대그룹들에서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다.

실제로 E그룹 회장은 지난 3일 전경련에서 열린 긴급 재계중진회의에서
"기업의 해외신인도가 중요한데 이런 일(비자금건)로 기업의 체면을 구기게
되면 앞으로 경영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하기사 당장 기업들의 수출이 줄어들고 있다든지, 이번 건으로 클레임이
발생했다든지 하는 대차대조표상에 수치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아직 돌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의 "의욕 저하"와 같은 무형적 손실만은 부인할 수 없는
"실제 상황"임에 분명하다.

정부쪽도 이 점을 가장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다.

통산부 고위관계자는 "지구촌 곳곳의 경제 전장에서 뛰어야 할 기업인들이
행여라도 의욕을 꺾이게 된다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총수 출두"의 후유증이 해외사업에서만 나타날 것 같지도 않다.

그룹내부의 임직원들에 대해 "령"이 서지 않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올해의 노사협상은 그럭저럭 큰 탈없이 넘겼다지만 내년이후의 협상테이블
에서 "성금 전달"이 분규의 빌미를 주는 돌출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으로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권력에 대한 자금수수에서 기업쪽은 언제나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면 돌을 맞아야 하는 쪽도 기업들이다. 이번에 입은
상처를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는 한 관계자의 하소연
은 재계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