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27일 노태우 전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성명"을 계기로 비자금 사태가
조속히 수습돼 더이상 기업경영 활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고 이번
기회에 해묵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 건전경영의 풍토가 마련되기를 희망
하고 있다.

기업들은 우선 나라안을 온통 휘저어 놓았던 비자금 파문이 하루속히
진정돼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게 가장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 비자금 조성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불가피하게 기업으로 확대되더라도
사법처리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게 한결같은 바램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경기가 정점을 지나 앞으로 하강곡선을 그릴게 분명한
상황에서 돌출한 비자금 사건은 자칫 기업활동을 위축시켜 급격한 경기하락
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이같은 걱정은 이미 일부 대기업들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정기임원인사
나 내년 투자계획 수립을 늦추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일각에선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에도 특혜시비를 우려해 대기업들이 소극적
인 자세를 보일 것이란 예상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이 때아닌 정치적 사건으로 기업들이 아예 일손을 놓아 버리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과거 청산의 대가치고는 너무 크지 않느냐는 지적들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정치문제 때문에 경제가 혼란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점에 재계뿐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계가 더이상
곤경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의 비자금 수사 초점이 "성금"을 낸 기업으로까지 번지더라도 민간
경제계가 "상처"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희망도 이런 차원이다.

전경련 관계자는 "노전대통령이 사과성명에서 비자금은 기업들의 성금을
통해 모았다고 밝힌 만큼 검찰수사에서 성금 제공자의 명단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점에 기업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며 "당국이 특히 이 부분에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계의 또다른 관계자는 "5,6공 당시 대기업의 청와대 정치자금 제공은
어쩔 수 없는 관례였으며 자금출처를 일일이 캐내 사법조치 한다면 안 걸릴
기업이 있겠느냐"며 "기업을 속죄양으로 삼을 경우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를 사법당국이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재계는 따라서 이번 파문이 권력과 기업간의 검은 고리를 단절하고 기업들
이 다시 뛸 수 있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또 이번 기회에 기업 스스로도 권력에 기대는 자세를 일신하고 공정한
경쟁에 나설 수 있는 건전한 경제풍토를 마련하는데 앞장서야 한다는데도
공감하고 있다.

대우그룹 관계자는 "이번 비자금 사태를 부패척결과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여기엔 정부와 기업이 모두 환골탈태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도 "문민정부들어 청와대가 정치자금을 받지 않는등
경제계와 정치권의 관계가 투명해 지고 있는 과정에서 벌어진 이번 비자금
파문은 오히려 그런 추세를 가속화 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앞으로는 공기업 민영화나 정보통신사업등과 같은 대형 프로젝트
수주전에서 공정경쟁의 풍토가 자리 잡기를 강력히 바라고 있다.

과거 기업들의 권력에 대한 "성금"이 순수한 목적보다는 일정한 반대급부를
바랬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이제는 기업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런 검은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번 파문을 지켜본 일부 기업들에서 "기업들의 각종 성금등을 은근히
바라는 정부도 문제지만 이런저런 형식의 준조세를 경쟁적으로 내는 기업
풍토야말로 차제에 개선해야 한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세계무역기구(WTO)체제의 새질서 아래서는 "깨끗한 국제거래 질서의
확립"이 공동의 관심사인 만큼 한국기업들도 더이상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안주해선 안된다는 점도 재계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점이다.

어쨌든 재계는 전대미문의 전직 대통령 비자금 파문이 과거의 상처를
들쑤셔 모두가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짊어지는 결과보다는 아픔을 딛고
모두가 함께 일어서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28일자).